'보란 듯이'라는 말이 맞을까. 이상하게 남편이 없으면 아이들 음식에 더 신경 쓴다.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독기 오른 심술의 원인은 뭘까. 냉장고를 후루룩 살펴본다. 각종 채소의 재고를 파악해 일주일 치 식단표를 작성한다. 간단한 조식 메뉴, 간식, 저녁 메인 반찬과 국을 주르르 쓰고 한 장을 북- 찢는다. 싱크대 위 상부 장에 붙인 뒤, 비장하게 바라본다. 이제 네임펜으로 지워갈 일만 남았다.
나는 냉장고를 채우는 속도만큼이나 냉기가 구석구석 돌아다니길 바라는 사람이다. 사는 데 돈 쓰고 또 빨리 소진하려고 애쓰는 바람에 카드 마그네틱은 매번 몸살이다.
두 녀석의 입맛은 어찌나 아롱이 다롱인지. 아니면 고생한 만큼 보답 받는 걸까. 엄마의 자존심을 싱크대에 내 박던 첫째는 비교적 편식 없이 고루 잘 먹는 입맛으로 자랐다. 된장찌개의 표고버섯을 골라 먹고, 입맛 없을 때는 오이지와 깻잎장아찌가 제일이라는, 노인정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9살 입에서 나온다. 살짝 매콤한 맛을 좋아해 간장국수보다 고추장이 가미된 비빔국수를 원하며 갈비탕 속 팽이버섯을 먼저 찾는 어린이다. 어렸을 적, 어떻게든 한 숟가락만 더 먹이려 애쓴 어미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 건지, 이제는 엄마 밥공기보다 양도 많아졌다.
그에 반해 2.38kg의 저체중으로 태어난 둘째는 여전히 오리무중 밥상이다. 오죽하면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그거 말고"일까. 한식파 첫째와는 다르게 아침부터 당 파티를 원하는 둘째는 테두리 제거한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던가, 시리얼과 과일을 요구한다. 현재도 유난히 작은 키를 위해 건강식 아침을 주고픈 어미 맘은 모른 채, 오늘도 집에 없는 메뉴만 쏙쏙 골라 주문하는 너. "그거 말고."
이렇게 끼니에 목숨 거는 엄마가 되고선 모든 걸 밥과 연관 짓는 버릇이 생겼다. 며칠 집밥에 소홀하면 역시나 틈을 놓치지 않고 컨디션 난조를 호소하는 애들이다. 휴, 조리도구에 근심이 덧붙는다. '요즘 밥에 통 신경 못 썼나.' '환절긴데 메뉴가 부실했나.' 맞물려진 입새로 한숨이 새어 나오며, 요령 피웠던 주방에 반성의 칼질이 유난을 떤다.
물론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잘 클 애는 군것질로도 큰다는 사실은 말해 뭐할까. 궂은 날씨에 하루 종일 뛰어도 지치지 않는 슈퍼 유전자. 가끔 지인 중에 그런 집이 있으면 '내 애씀이 부질없나' 싶지만, 좋은 유전자를 주진 못한 씁쓸함인 걸 어쩌겠나.
임신과 함께 자궁근종을 발견하고, 더 이상 크기를 재는 것이 무의미했다. 흡사 쌍둥이처럼 영양분을 빼앗긴 아이는 41주를 넘어 간신히 3.0kg이 됐다. 더군다나 한 살 터울로 낳은 둘째는 첫째 육아와 겹치며 생각도 못 한 모습으로 만나야만 했다. 놀이터에서 나이 확인 사살을 받을 때마다 근종이 생각났다. 푸른빛이 도는 수술실에서 창백한 조명 아래 새우등을 구부렸던 시간. 그 차디찬 수술 침대는 영양분 없는 메마른 대지 같았다. '내 몸' 속 장기지만 이미 내 관할 구역이 아니었으므로, 낳아서 손수 노동력으로 키워야 한다는 저명한 사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박이 생겼다.
낳아서 제대로 된 영양소를 '입'으로 넣어주리라.
뜨거운 모성이 이따금 솟구칠 때마다 OMR카드 보듯 식단표를 살피게 됐다.
모성이 들끓는 시간. 어미로서 강한 생존력이 발휘되는 시간. 돌고 도는 끼니 고개 속에 냉장고를 파헤친다. 문제는 이 모성이 들쭉날쭉한 조울증 상태의 마르지 않는 글감이라는 점. 한없이 지칠 때는 냉장고 은빛 문짝이 교도소 철문 같고, 의욕 충만할 때는 집안 조리도구 운동회가 시작된다. 흡사 정신 나간 엄마의 부엌이랄까. 아일랜드 식탁 위, 기분 좋은 팝송과 함께 환기하며 3구를 불태우는 날과 배달 앱 킬 힘마저 없을 때가 공존한다.
감정의 순환과 함께 엄마의 냉장고도 순환되는 걸까. 육아 스트레스를 확인하는 검사가 따로 있나, 그녀들의 냉장고가 바로미터다. 흐물흐물해진 채소의 누수 현장이 발견되거나, 모른 채 했던(그리고 굳이 알고 싶지 않던) 양파의 문드러짐이 드러난다. 나도 모르게 양육 중인 감자와 마늘 싹도 발견할 수 있으니, 난 모두의 '마더'인 게 분명함은 어떻고. 의욕 충만하게 채워 놓은 유통기한은 내 휘황찬란한 작심삼일의 민낯이다. 며칠을 못 가고 매번 눈엣가시인 날짜를 눈감으며 도로 문짝을 닫아버리니깐. 안 보이면 그만.
이를 알 리 없는 탁상행정 관료들은 읽어 내려가기도 힘든 각종 물음과 수치를 제시한다. 이는 또 다른 엄마 역할 테스트에 대한 채점표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니, 마음 상태를 물어보려든 먼저, 우리 집 냉장고로 초대한다. 거기 비밀이 있다.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나만의 비밀, 직시하지 못한 나의 감정이.
그들에게 우리 집 냉장고 초대장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