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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랑땡 Jun 09. 2021

29살 남자가 바퀴벌레를 만났다.

엄청 큰.

여름이 다가온 밤은 서늘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내리쬐는 햇볕의 맹렬함. 그 끝 자락과 뒤섞인 느긋함이 바람을 타고 느껴진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긴장이 탁하고 풀리기 마련이다. 편하게 일하기 위해 구매한 시디즈 의자에 기댄다. 코인세탁방에 가지 않으면 당장 씻을 수도 없지만 나중 일이다. 유튜브를 보며 아이코스를 한 대 빨기 시작한다. 느긋한 바람이 연기를 흐릿하게 한다.


두 시간 정도 늘어져 있으니 나를 압박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오늘 코인세탁방에 가지 않으면 씻지 못한다.’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우측에 손바닥만 한 낯선 것이 보인다. 우측 흰 벽엔 아무것도 없어야 하지만 그게 들어왔으니 큰일이다. 그것을 지켜보며 전기 모기채와 홈키파를 챙긴다. 지금 내가 가진 무기는 다이소에서 산 이 친구들 뿐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그 흰 벽에 붙은 물체를 마주한다. 몸집은 아이폰 12 프로 사분의 일 크기. 다리를 펼치고 긴 더듬이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손바닥만 해 보인다. 인생에서 본 그것 중 가장 큰 바퀴벌레.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지어진 지 50년 된 집이니 당연히 있겠지만 항상 새끼들만 봐와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섣불리 행동하면 날아들 것이다. 그 정도의 연륜과 아우라가 있어 보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점점 천장 쪽, 대각선으로 움직인다. 이러면 싸우기 더 곤란하다.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는 홈키파를 뿌리며 전진한다. 기분이 나빴는지 빠른 속도로 벽을 돌아다니다 커튼 뒤로 숨는다. 역시 연륜이 있다. 굴하지 않고 홈키파를 뿌리며 커튼을 슬쩍슬쩍 들춘다. 녀석의 행방이 묘연할 때쯤 반대편 벽에서 다시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녀석은 천장 가까이에 있다. 전기 모기채로 제압할 수 있는 거리 밖이다. 아래로 유인해야 한다. 하지만 녀석이 달려들 걸 생각해야 한다. 충분한 거리를 두기 위해 다시 홈키파를 뿌리는 방법을 택한다. 정말 화가 났는지 천장을 타고 거꾸로 나를 향해온다(바퀴벌레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물러나지 않았다. 매섭게 홈키파를 뿌린다. 모기용 스프레이가 독하긴 했는지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내 침실 쪽이다.


침실로 사라진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천장, 벽, 문 뒤, 침대 밑, 베개 사이. 그는 어디에든 숨을 수 있다. 은 엄폐하기 좋은 침실로 들어간 선택은 칭찬할 만하다. 이제 그를 도발할 수밖에 없다. 문 뒤부터 침대 밑, 베개 사이, 이불까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홈키파를 뿌린다. 죽은 시체를 확인하기 전엔 멈출 수 없다. 이건 누가 진정한 세입자인지 가리는 대결에 가까웠다. 다행히 그는 침대와 벽 사이에서 긴 더듬이를 바짝 세우며 나왔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전기 모기채로 바퀴벌레 구이를 할 생각이었으나 그는 전기 따위에 굴복할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기채를 돌려 잡고 내리친다. 적중이다.




베개 위에 떨어진 그는 삶의 지독함을 보여준다. 그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몇 차례 더 내리쳐야 했다. 아드레날린으로 증폭된 심장 소리를 낮추기 위해 잠시 다른 곳을 보며 한숨을 쉰다. 이제 시체 수습을 하려면 물티슈가 필요하다(휴지에 비해 두껍다). 물티슈 두 장과 함께 돌아와 그를 살핀다. 아직 죽지 않은 것 같다. 그 녀석은 결국 베개 사이로 들어갔고 나는 온 침구를 다 뒤집고도 찾지 못하여 침대를 몇 번 옮긴다. 부상당해 뒤집어진 그 녀석을 확실하게 끝낸다. 빗자루로 현장 수습을 하다가 문득 목 뒤가 간지럽다.


‘바퀴벌레의 계절이 왔다.’




+ 창문이나 하수구로 들어올 사이즈가 아니었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나를 따라 졸졸졸 들어왔을 걸 생각하니 약간 어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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