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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링 Jun 05. 2023

나답지 않음의 기적

누구야!?


 꺼져있어야 할 방 불이 켜져 있거나, 변기물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우리 아빠는 큰 소리로 누가 이랬는지를 물었다. 기껏 해봐야 엄마, 남동생 그리고 나 세명의 용의자가 있을 뿐인데도 아빠는 “이 씨 누구야 누구!” 하며 뒷정리하지 않은 그 한 사람을 기어코 밝혀내곤 했다. 아빠의 큰 소리에 움찔하면서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내가 아니고 동생이 범인이라는 사실에 다행히 나는 비껴갔다는 생각이었고, 둘째는 아빠도 뒷정리 안 할 때가 있으면서 왜 우리에게만 타박을 하냐는 억울함이었다. 따까리 같은 엄마와 나는 대장 앞에서 거센 저항을 할 수 없었기에 뒤에서 수군 수군댔다. 그러다 어느 날 아빠는 면도하고 난 후의 세면대의 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화장실을 떠났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엄마가 누구야 누구!  빽빽 외쳤다는데 후다닥 돌아온 아빠는 배시시 웃고 말았단다.


 오빠랑 결혼하고 살면서는 움찔할 일이 없었다.


  아내가 머리를 감고 말리는 자리에 수북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남편은  악 머리카락이다! 소리 지르며 열심히 청소해 주었고, 밤새워 설교 쓰느라 스트레스받았을 남편을 위해 그가 먹고 꼬깃꼬깃 딱지처럼 접어둔 과자 봉지는 내가 말없이 피식 웃으며 정리해 주었다. 가만 보면 우리는 서로가 사정이 있어 뒷정리를 깔끔히 할 수 없다는 걸 이해했던 것 같다. 아침 출근길 부랴부랴 준비하는 아내와 머리 쥐어뜯으며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남편에게 다시 뒤를 돌아 깔끔히 정리할 만큼의 여유는 없으니까. 남편의 말마따나 여유 있는 사람이 먼저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잘 몰랐다.

직장에서는 나도 여전히 아빠처럼 누구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다녔다는 걸.


 타이틀을 얻고 나니 실수에 대해 더욱 민감해졌다. 나뿐 아니라 여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더욱더 세심하게 일처리 하기를 바랐고, 누구라도 실수가 나는 날에는 내가 더 잘 관리하지 못해서 그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내 성정이 그리고 성격이 이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하는 고민이 깊어지면 좌절감은 더욱 심해졌다.


 고객으로부터 컴플레인이 들어온 후에는 실수에 대한집착이 더 심해졌는데, 그들에게 책 잡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진행한 일에 있어 탁월함을 보이고 싶었다. 나만 믿고 따라오면 잘 될 것이다라는 신뢰를 주고 싶기도 했다. 나는 그런 자리에 있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렇게 일해야 했다. 다그닥 다그닥, 내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는 더 경주마처럼 열심히 달려야만 했다.


달리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마치 초등학생 3학년 때 미션 달리기를 통해 만났던 선글라스 낀 아저씨와 함께 달리는 꼴이었는데, 안 그래도 뒤처지고 있던 나는 주어진 미션 종이를 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선글라스 낀 사람과 함께 달리라니? 눈을 크게 뜨고 선글라스를 찾던 중 아저씨를 발견했고 나는 아저씨! 빨리요 빨리! 를 외쳤다. 키가 컸던 그 아저씨는 나의 다급함에 부응하듯 정말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다리의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내 발은 땅에 닿지 못하고 붕붕 뜨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듯이 뛰던 나는 결국 땅바닥에 푸더덕 엎어졌고 엉엉 우는 날 두고 아저씨는 미안하다 연신 말하다가 군중 속으로 사라지셨다. 아저씨는 이기고 싶은 마음에 나를 더 배려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가 딱 그 아저씨 같았다.


 더 잘해야 된다 라는 일념 하나로 일하다 보니 컴플레인 하나에도 과열되곤 했다. 누가 일처리를 이렇게 한 건지, 잘잘못을 가리자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고 예민하게 쏘아댔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만 보일 뿐 한편에 숨겨진 그들의 속사정이 보이거나 나 또한 때때로 실수를 한다는 것은 도통 깨닫지 못했다.


한 분은 나의 이런 추궁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분을 곤란하게 할 의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나의 흥분된 모습은 누군가를 충분히 아프게 할 만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며 죄송하다, 나의 입장을 차근히 설명해 드리고 손을 마주 잡으며 잘 풀었지만 그곳을 나선 이후로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뭐랄까. 내가 온 힘을 다해 잡고 있던 모든 끈들이 우지끈 후드득 나가떨어지는 느낌.


 일하는 하루 종일을 우울하게 단순 작업만 하다 퇴근했다. 닦달해야 할 일은 수 없이 많았지만, 내가 안달 난다고 완전하게 될 일인가 싶었고, 완전하게 일이 된다 하더라도 더는 안달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질려버렸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직원들이 밉다기보다, 그들을 이만큼이나 지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내가 아닌가 싶어서. 열심히 하는 내가 참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동안은 전화기를 붙들고 부들부들 하소연을 하다가 남편 앞에 풀썩 주저앉아 투덜투덜 찡얼댔다.


나 책 잡히기 싫어! 흠 잡혀서 욕먹는 게 너무너무 싫단 말이야! 실수하기 싫어, 절대로!


남편은 조용히 듣더니 말했다.


실수를 안 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야.

실수를 하더라도 받아들이고 고쳐나가는 게 중요해.

당신이 모든 사람의 실수를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어? 그 많은 사람들이 완벽하게 일할 수 있게 끌고 가려니 지치는 거야. 최선을 다해서 일하되 실수가 났을 땐 받아들여. 당신의 책임이 아니야. 팩트로 받아들이고, 개선할 부분은 차근히 고쳐서 대응하면 되는 거야.


잠자코 생각했다.

남편의 말이 옳았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과 열심히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어쩌다 욕이 먹기 싫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까. 욕이 그만큼이나 싫었나. 관리 잘하라는 말, 거기 문제 있다는 말. 생각만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치욕적인 말들. 이 회사를 까내리는 말들이 수화기 너머로 내 귀를 날카롭게 내리칠 때 나는 그 모든 공격이 날 향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책임자로서, 중간 관리자로서, 리더로서.


넌 못난 사람이야. 이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라는 공격에 나는 못난 사람이 아니라고, 이런 것쯤은 나도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입증해야 했다.


내 능력을. 나의 자격을. 내 존재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수에도 조금은 너그러운 말을 듣고 자랐으면 어땠을까. 누구야! 하는 날카로운 말이 아니라, 다음에는 이렇게 해달라는 다정하며 따르기에 분명한 지침을 듣고 자라났다면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까.


하나님은 늘 그랬다. 너그러우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나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들어 버려 주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아 주신다는 하나님. 나의 온갖 더러움, 죄악과 실수를 단번에 용서해 주신 예수님. 매일 죄를 밥 먹듯 지어도 결국에는 다시 사랑으로 회개까지 이끌어주시는 성령님.


나를 위해, 그리고 나의 이웃을 위해 내가 매일 다시 듣고 배워야 할 말은 “누구야?” 가 아니었다. 죄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실수를 들춰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며 결코 내가 따라야 할 모양도 아니구나.


인생은 자연스레 본 대로 흘러간다. 엄마의 행동을. 아빠의 말투를. 싫다고 아니라고 해도, 평생 보고 자란 대로 살아갈 때가 참 많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모른 채로, 살아지는 대로 말이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살아야 할 이유다. 생긴 대로 살지 않기 위해. 예수님의 새끼발톱만큼이라도 본받으며 살기 위해. 내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 더 깊이 남기지 않기 위해.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부르르 떠는 일이 있었다. 누가 그랬냐고 묻기 일보 직전에 문득 깨달았다. 아, 나 이러지 않기로 했지. Right, guys. I’ve decided to stay cool. chilled. 그러곤 쉼 호흡 몇 번을 했더니 좌우에 있던 두 명 다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러기 전까지 이들도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는데. 다 같이 웃고 일단 넘어갔다.


여보. 오늘도 갑자기 일이 안돼서 너무 화가 나려는데 일단 참았어. 너무 다행이지 뭐야. 흥분은 엄청 했는데, 그 와중에 그러지 않으려던 게 생각이 났어.


조잘대는 내게 남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때마침 내일 새벽 설교는 분노를 다루는 방법이라고, 꼭 설교를 찾아 들으라며.


분노가 나려다가도 문득 멈추게 하시는 게 내게는 가장 큰 은혜다. 나대로 살도록 그냥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발버둥 치기를 늘 격려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로 사는 아링의 인생.

나답지 않은 인생을 사는 기적.


사진출처_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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