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 ‘kyo181’ 감상기
평상시에는 거의 아이돌 노래만 듣는 케이팝 오타쿠처럼 굴지만, 사실 밴드 음악을 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취미를 즐긴다는 느낌을 준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이기는 한데, 아이돌 노래를 들을 때 내가 주목하게 되는 건 노래의 분위기와 퍼포먼스, 그리고 그 아이돌이 그리고자 하는 기획이다. 반면에 밴드 음악을 들으면, 그 노래를 연주하는 각각의 사람들을 상상해보게 된다. 알 수 없는 가사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음악의 세부적인 면면을 뜯어보려는 묘한 집념을 갖게 된다.
어쩌면 최대한의 집중력을 요하는 밴드 음악을 대하는 내 태도가 문제가 되어, 웬만하면 어떤 밴드의 노래를 그저 흘려듣는 편이다. 그러니까, 실리카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종의 사고였다. 워낙 유명한 밴드라는데도 통 밴드 음악 쪽에 관심을 차단하고 살던 중이라 실리카겔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못된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실리카겔의 노래를 들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발매된 NO PAIN부터 시작해서 거의 역순으로 실리카겔의 거의 전곡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멤버들의 군 제대 이후 발표한 첫 곡이라는 Kyo181은 여러모로 가장 마음에 드는 실리카겔의 곡이다. 정확한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는데도 뭔가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 같은 가사도, 은은한 것 같았던 향수의 잔향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만 같은 느낌의 보컬의 무드도,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기승전결을 갖춘 세션 사운드도, 갑자기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탁 끊어져버리는 노래의 끝도. 심지어는 리와인드가 반복되며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반복되는 기묘한 뮤직비디오까지도.
쿄는 대체 누구일까? 181이 보컬이자 키보드인 김한주의 키에서 따온 숫자라고 하는데, 표면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설명이다. kyo는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데 엄청나게 집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쿄가 대체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노래의 화자는 계속해서 쿄에게 질문을 건넨다. 쿄는 숨바꼭질을 했다. 노래의 화자는 술래는 누구냐고, 어디에 숨었냐고, 숨다가 마을 밖에 나가기까지 했냐고, 그래서 친구는 도대체 어딨냐고 묻는다. 화자는 쿄에게 학교는 갔었느냐고 묻는다. 비밀은 지켰냐고, 지독한 사랑을 열망하느냐고도 묻는다. 그러고는 여권을 챙겼느냐고도 묻는다. 아직 떨고 있냐고, 복수를 꿈꿨느냐고,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
쿄는 친구에게서 숨어버렸고, 학교인지 어딘지에서 지독한 사랑을 열망했고 그 비밀을 지켰고, 어딘가로 훌쩍 떠날 생각을 하면서 떨고 있다. 복수를 같이 꿈꾸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쿄에게 이제는 반복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해봤냐고, 이혼을 해봤냐고, 꿈을 꾸어봤냐고, 그리고 “날 만져봤냐고.”
노랫말을 쓴 당사자가 뜻을 적극적으로 숨겨놓은 시점에서 쿄가 누구이고 화자가 왜 자꾸 질문을 건네는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의 문제가 된다. 나는 쿄가 아무래도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가 호명하는 자기 자신 같다. 하지만 그 누구래도 좋고, 결국엔 누구한테 물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하고, 이혼(이별)을 하고, 꿈을 꾸고, 누군가를 어루만지고, 하지만 그 모든 걸 비밀로 하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를 꿈꾸다가 숨어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기도 하니까.
세 차례 반복되는 마지막 질문의 타래들이 처음으로 읊어진 이후 시작되는 노래의 간주 부분을 뮤직비디오는 아직 채 마무리되지 않은 영상물의 엔딩 크레디트로 채운다. 그리고 새로운 두 번의 질문 덩어리들이 흘러나올 때, 갑자기 영상의 편집자가 등장하고 그는 곧 살해당한다. 그러고는 지금껏 틀어놓은 영상의 편집자가 살해당하는 영상이 상연되는 극장 앞에 쪼그려 앉은 밴드 멤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지금까지의 영상이 아무렇게나 리와인드되다가 갑자기 노래가 멎는다. Kyo181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노래가 갑자기 아무렇게나 멈추기 때문이다. 갑자기 카세트테이프의 줄을 끊어버린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절대로 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만이 반복되는 노래의 적절한 마무리 같다.
아마도 Kyo는 더는 노래를 들을 수 없어서, 그래서 줄을, 노래를,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어쩌면 그 노래를 부른 자기 자신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일 테다.
나는 사실 너무도 살고 싶은 사람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때가 있고, 나를 죽이는 감각에 대해 고민해보게도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픈 감정들을 살피며. 그러니까 나는 내가 질문할 수 있는 쿄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기도 하다. Kyo야 날 죽여보았니, 어땠니, 쉽게 죽었니, 눈물은 흘렸니, 아니면 옅은 미소를 띠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