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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an 22. 2024

혁명에 불을 지핀 과학, 백과전서파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5)

1727년 아이작 뉴턴의 장례식이 열렸다. 생전 최고의 권위를 누렸던 이 대학자는 죽어서 묻힐 때도 영예로웠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시신 운구는 상원의장과 다섯 명의 귀족이 맡았다. 장지는 영국 국교회의 성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정해졌다. 묘비명은 대문호 알렉산더 포프가 다음과 같이 썼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따온 이 문장은 한 인간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일 것이다. 뉴턴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조폐국장, 국회의원, 왕립학회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도 받았다. 과학자로서는 최초다. 그의 장례식은 이 모든 업적을 역사에 봉인하는 장엄한 행사였다.

    



볼테르의 문화충격


볼테르도 조문객 중 하나였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몇 년 전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영국으로 피해 있던 참이었다. 그래도 영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지적으로 풍요로웠다. 커피하우스에서 존 로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교류했고,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접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뉴턴의 장례식까지 참석한 것이다.

      

여기서 볼테르는 큰 충격을 받았다. 뉴턴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냥 대학교수 아닌가? 그런데 장례를 국가가 치러주고 온 국민이 애도한다고? 이는 영국이 신분보다 지식을 존중하는 사회임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반면 그 무렵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무분별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났으나, 황제 루이 15세는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주색잡기를 비롯한 문란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뉴턴과 같은 평민의 죽음이 국장으로 예우받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영국의 국가적 성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뉴턴 묘지. 뉴턴은 살아서는 물론 사후에도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당시 볼테르는 패기는 넘쳤으나 지적으로 덜 다듬어진 사상가였다. 그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간 영국에서 그는 비로소 사상의 준거로 삼을 만한 사회를 만났다. 볼테르의 눈에 비친 영국은 자유, 관용, 정의가 꽃피운 이성의 나라였다. 왕의 목을 친 국민의 대표들이 통치하고, 국민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설령 이교도라 해도 박해받지 않았다. 귀족이나 성직자들보다는 과학자와 지식인이 존경받았다. 볼테르는 조국 프랑스를 개혁하기 위해 이런 영국을 모델로 삼기로 했다.

      

특히 볼테르가 주목한 것은 뉴턴역학이었다. 그가 『프린키피아』에서 본 것은 행성의 운동법칙만이 아니었다. 어떤 독단이나 편견도 없는 수학의 진리와 그 저변에 흐르는 강력한 시대정신을 감지했다. 『프린키피아』의 핵심은 우주가 하나의 원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볼테르의 비전은 이것을 정치와 사회에도 적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볼테르의 친구이자 ‘뉴턴의 하수인’을 자임한 로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크는 개인들의 상호 계약을 바탕으로 국가가 이루어진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창했다. 이러한 계약은 사회의 공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개인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사회계약으로 개인은 자유를 보장받고, 국가는 개인에 보호 의무를 진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의 기본 모델이 된다. 볼테르는 영국에서 뉴턴역학, 종교의 자유, 입헌정치, 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어 공존한다고 생각했다. 그 연결의 핵심 고리는 곧 뉴턴이 확립한 과학적 사유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영국 생활을 정리하는 책을 냈다. 1733년 발간된 『철학서한』, 또는 『영국에서의 편지』라는 책이다. 25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영국의 제도와 문화를 소개하면서 프랑스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결론 격인 마지막 에세이에서는 대학자 블레즈 파스칼까지 소환한다. 파스칼은 유고집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문장에서 보듯 파스칼은 인간의 이성보다는 신앙에 충실한 학자였다. 하지만 볼테르는 파스칼의 신앙은 미신에 불과하며, 신의 섭리에 따르라는 태도는 비관적 염세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세계로 도망치지 말고,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극복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강조했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찬사를 받았으나, 프랑스에서는 금서가 되었다. 볼테르는 또다시 피신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프로피신러 볼테르로서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지만.


테르는 연인이자 최초의 근대적 여성 과학자인 에밀리 뒤 샤틀레의 성에서 은신했다. 그때만 해도 여성은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었으나, 샤틀레는 부유한 집안 배경 덕분에 물리학을 전공할 수 있었다. 그녀도 볼테르의 영향으로 뉴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에 볼테르와 함께 1738년 『뉴턴철학의 요소들』을 저술했다.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데카르트가 평정한 뒤였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은 우주의 근본 법칙으로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볼테르와 샤틀레의 노력으로 뉴턴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볼테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뉴턴 추종자였으나, 그도 어쩔 수 없이 ‘문송한’ 인문계 출신이었다. 물리학자 샤틀레는 그런 볼테르의 개인교사이자 공동작업자 역할을 했다. 1749년 사망할 때까지 샤틀레는 『프린키피아』의 번역에 모든 것을 바쳤고, 이 책은 1759년에야 출간되었다. 볼테르는 오랜 연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서문을 썼다. 샤틀레 버전 『프린키피아』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표준적이고 유일한 번역본이다.

볼테르의 연인이자 최초의 근대적 여성과학자인 샤틀레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에서 표준으로 꼽히는 『프린키피아』를 번역했다.




뉴턴역학에서 계몽주의로


뉴턴을 알리려는 볼테르의 활동은 계몽주의에도 불을 붙였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힘으로 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다. 그럼으로써 자연을 알고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무한한 진보의 가치를 역설했다. 여기서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아는 행위’가 17세기 과학혁명의 철학적 핵심이었고, 이것이 18세기 계몽주의적 실천으로 이식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절대왕정과 가톨릭교회로 상징되는 구체제의 혁파를 의미했다. 이제 과학은 자연의 이해를 넘어 사회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과학의 성과들은 계몽주의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예컨대 원자모형은 인간을 원자로서 이해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이로써 사회의 질서는 원자들에 의해 어떻게든 만들어진다는, 개인주의와 사회계약론에 영향을 미쳤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받아들인 철학자들도 있었다. 공리주의의 기수 제러미 벤담이 대표적이다. 벤담은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자연의 만유인력과도 같다고 보았다. 이에 기초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철학의 원칙을 세웠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살롱은 계몽주의자들이 모이는 사랑방과도 같았다. 런던의 커피하우스가 그랬듯 이곳에서도 신학문의 여러 경향이 논의되었다.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살롱을 커피하우스와 함께 근대사상을 잉태한 지적 근거지로 평가하는 이유다. 살롱은 주로 교양 있는 귀부인(마담)들이 운영했다. 그들은 음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의 토론 사회자 역할도 맡았다. 오늘날 살롱과 마담이라고 하면 어쩐지 불건전한 느낌이 들지만, 원래 의미는 이렇게 지적이고 품격이 있었다. 살롱이 고급스럽고 엘리트적이었다면, 카페는 좀 더 대중적인 공간이었다.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가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신 곳으로 유명하다. 이 카페는 국립극장 앞에 있어서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볼테르 외에도 드니 디드로와 장 자크 루소도 단골이었다. 셋은 이성과 과학을 신봉한 무신론 성향의 급진주의자라는 점에서 죽이 잘 맞았다. 그래서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현실의 방법에 대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론했다.

    

1745년 디드로는 그 ‘방법’으로 어떤 책을 구상했다. 18세기는 과학혁명 이후의 학문 발달로 지식이 어느 때보다 급증한 시기였다. 이에 이 지식을 체계적으로 분류 및 정리하려는 시도들이 중요해졌다. 특히 데카르트의 후배 라이프니츠는 세상 모든 지식의 체계와 질서를 세워 보편학으로 정립한다는 비전을 내세웠다. 너무 원대한 꿈이라서 결국 실패했지만 말이다. 1728년 영국의 에프라임 체임버스가 낸 『백과사전(Cyclopedia or Universal Dictionary of the Art and Science)』은 최신의 지식을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백과사전의 시초가 되는 책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오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책이었었다.

     

이 책이 히트하자 프랑스의 출판업자들도 번역본을 내려고 했다. 그 기획을 맡은 이가 디드로였다. 디드로는 살롱에서 자주 만나던 수학자 장 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를 공동편집자로 끌어들였다. 뉴턴의 계승자였던 달랑베르는 이미 25세에 파리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로 천재적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꼽히는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논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도 사상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계몽주의자였다. 이렇게 혈기왕성한 두 급진적 학자들이 만났으니,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했다.

파리 국립극장 앞 프로코프에서 토론하는 볼테르와 계몽주의자들(위)과 현재의 모습(아래). 파리의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가장 방대하면서 급진적인 사전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체임버스의 책도 이미 한물갔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획 방향을 틀어서 완전히 다른 책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계획이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당대의 일류 문필가, 과학자, 사상가 등을 총동원하여 지구상의 지식을 한데 모으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위대한 성취인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 이하 백과전서)』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백과전서』의 중요한 특징은 학문과 예술은 물론 직업적 전문기술까지 포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 진지한 학문적 검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항목들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예컨대 살구 항목을 보면, 살구나무의 식물학적 특성에서 시작하여 살구잼 만드는 방법까지 소개했다. 또 당시의 핵심 기술이었던 강철 제련은 다른 항목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며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도판까지 첨부다. 지식의 실사구시적 활용을 중시한 저자들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백과전서』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정치적 성격, 정확히 말해 반체제적 목적 때문이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이 책이 방대한 이론적 지식은 물론 강렬한 실천적 메시지도 갖기를 원했다. 따라서 지식의 단순 배열이 아닌, 연결과 파급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볼테르가 뉴턴역학을 정치와 사회로 확산하려 한 것과 마찬가지의 시도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왕정과 교회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비판적 이론들로 가득하다.

      

우선 디드로는 정치권력 항목에서 왕권신수설을 부인하고 개인주의와 무신론의 논리를 설파했다. 루이 드 조쿠르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을, 루소는 그의 시그니처인 사회계약론을 소개했다. 후일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이론적 근거들을 예견이라도 하듯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듯 『백과전서』는 일반적인 사전들이 추구하는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당시의 체제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당파적 성향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편집진의 명확한 의도에 따른 것이다. 디드로는 『백과전서』의 발행 목적을 두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하나의 테두리(cycle) 안에 모든 지식(paedia)을 넣는다는, 백과사전 단어의 뜻 그대로다. 둘째는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의 변화는 체제가 강요하는 관념에서 벗어나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드로가 보기에 좋은 사전은 사람들의 이성을 일깨워서 사회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이어야 했다.




혁명을 향하여

     

책의 목적이 이러했기에 출간 과정이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1750년 디드로가 쓴 취지서가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달랑베르가 서문을 쓴 제1권이 출간되었다. 『백과전서』의 철학을 밝힌 달랑베르의 서문은 후세에 길이 남을 명문장으로 꼽힌다. 『백과전서』의 수많은 항목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혔다. 그러나 이 제1권부터 당장 문제가 되었다. 교회는 『백과전서』가 표방하는 무신론을 문제 삼았다. 프랑스 정부도 같은 생각이어서 1752년 제2권이 출간되자마자 교회의 간행 중지 요청을 받아들였다. 『백과전서』는 불온서적으로 찍혀 그 원고를 압수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두 명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먼저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이다. 그녀는 살롱을 운영하면서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해왔다. 이에 『백과전서』도 계속 출간될 수 있도록 막후에서 도왔고 살롱에도 비치해 놓았다. 라무아뇽 말제르브도 위험을 무릅쓰고 출간을 도운 이 중 하나였다. 그는 대법관의 아들이자 정부의 도서정책을 총괄하는 출판총감이었다. 하지만 이런 배경과 달리 사상적으로는 계몽주의에 동조했다. 그래서 경찰에게 압수당할 처지가 된 『백과전서』의 원고들을 빼돌려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물론 이랬던 말제르브가 이후 공포정치 시대에 기요틴에서 처형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창 『백과전서』가 집필 중이던 1757년,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전직 군인의 소행이었다. 다미앵은 루이 15세의 무능과 백성들의 고통에 분노해 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2달 동안 어마어마한 고문을 당하다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이 과정은 철학자 미셸 푸코의 명저 『감시와 처벌』의 도입부에 등장하기도 한다. 다미앵 사건의 불똥은 『백과전서』에도 튀었다. 검열과 탄압이 더욱 거세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출간을 이어갈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1759년 제7권 출간 후 달랑베르와 루소가 손을 뗐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 둘이 그만두자 작업은 중단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외부의 탄압이 거세지면 내부의 단결도 강해지는 법이다. 조쿠르가 달랑베르의 후임으로 책임편집자를 맡아 출간을 이어 나갔다. 디드로는 검열을 피해 이곳저곳을 숨어 다니며 5,000개 이상의 항목을 홀로 집필했다. 결국 1765년, 『백과전서』는 제17권까지 모두 발간될 수 있었다. 1772년에는 도판까지 완간되었다. 총 기간 22년, 텍스트 17권과 도판 11권, 항목 71,000여 개에 이르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백과전서』의 모습(위)과 도판 일부(아래). 당시 떠오르던 신학문과 전문기술들을 망라했다. 이 책은 후일 프랑스대혁명에 강력한 이론적 기반과 실천적 계기를 마련했다.


백과전서파(Les Encyclopédistes)로 불린 이 책의 집필진은 18세기 계몽주의의 드림팀이었다. 이름을 밝혔거나 확인된 필진만 150여 명이다. 익명으로 기고한 사람까지 합치면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한 디드로, 달랑베르, 조쿠르, 루소는 물론,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 지질학자 폴 앙리 디트리히 돌바크, 시인 장 프랑수아 마르몽텔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렇게 내로라하는 지식인 집단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백과전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지식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바꿔야 사회도 진보한다는 디드로의 의도는 적중했다. 『백과전서』는 다양한 판본들이 간행되었고, 무려 25,000여 질이 팔려나갔다. 독자들은 『백과전서』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상의 비전에 열광했다. 그리고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사유를 내면화했다. 『백과전서』의 이론적 지향과 실천적 함의는 그렇게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사회로 스며들었다. 마침내 1789년,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자 곳곳에 형성되어 있던 『백과전서』의 애독자들은 그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장대한 서막은 그렇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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