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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an 19. 2024

신에게 가장 근접한 과학자, 뉴턴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4)

1684년 런던의 커피하우스. 세 남자가 커피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원래 유럽인들의 사교모임 주메뉴는 와인과 맥주였다. 그래서 모임을 하다 보면 다들 취해 있었다. 그러다 1615년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슬람에서 들여온 커피가 대유행했다. 커피는 정신을 일깨우는 각성효과가 있어서 지식인들이 애용했다. 이에 커피를 파는 곳도 급증했는데, 영국의 커피하우스, 프랑스의 살롱과 카페가 대표적이었다. 이곳에 학자, 예술가,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니 토론도 활발해졌다. 주제는 주로 당시 떠오르던 신학문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커피하우스의 별명이 페니대학교였다. 커피값 1 페니만 내면 최신의 지식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훅, 에드먼드 핼리였다. 1660년 출범한 런던 왕립학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이날의 토론은 태양과 행성의 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케플러의 법칙과 인력의 개념이 그 발단이 되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태양과 행성 사이의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가설이었다. 이른바 역제곱 법칙이다. 이 법칙은 왕립학회 내에서 이미 핫한 주제였다. 다만 아직까지 추측에 불과했다. 누구도 행성의 운동이 역제곱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다. 물론 미적분을 쓰면 어렵지 않게 계산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때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오랜 토론 끝에 핼리와 렌은 증명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반면 인정 욕구가 강했던 훅은 달랐다. 그는 끝까지 역제곱 법칙을 증명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남자들의 옥신각신이 으레 그렇듯 이 대화도 판돈 40실링이 걸린 내기가 되었다. 훅은 두 달 안에 증명하겠노라고 큰소리를 쳤고, 핼리와 렌은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케임브리지의 젊은 천재

     

몇 달 뒤 핼리는 케임브리지로 가서 아이작 뉴턴을 만났다. 당시 뉴턴은 왕립학회를 떠나 장기간 칩거 중이었다. 대충 근황 토크가 끝나자, 핼리는 얼마 전 커피하우스에서 토론한 역제곱 법칙 이야기를 꺼냈다. 뉴턴의 회고에 근거해 이 대화를 재구성해보자.

     

핼리: 행성이 태양을 향하는 인력이 태양까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행성은 어떤 궤도를 그릴까요?

뉴턴: 그야 당연히 타원이지.
핼리: 그걸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뉴턴: 18년 전에 계산해봤더니 그렇던데?
핼리: 뭐라고요? 그 계산한 것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으면서 왜 발표도 하지 않고…
뉴턴: 아 그 논문? 하도 오래돼서 어디 파묻혀 있는지 모르겠네. 그냥 내가 다시 계산해서 알려 줄게.
핼리: 헐…


핼리는 뉴턴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3개월 뒤, 뉴턴으로부터 9쪽짜리 원고를 받고 기절초풍했다. 정말로 역제곱 법칙이 증명돼 있었다. 그것도 어디 하나 건드릴 곳 없는, 갓벽하게 아름다운 수식으로. 핼리는 이 위대한 발견을 18년이나 묵혀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그 길로 뉴턴을 찾아가 어서 발표하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뉴턴은 내켜하지 않았다. 왕립학회 터줏대감이었던 훅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었다. 뉴턴이 학회를 떠나 케임브리지에 칩거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20대의 뉴턴이 페스트를 피해 내려와 있던 고향 울즈소프 장원. 이곳에서 만유인력, 미적분, 광학의 위대한 발견을 한꺼번에 해냈다. 그 유명한 뉴턴의 사과나무도 여기 있다.


이미 뉴턴이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될 때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뉴턴은 광학 연구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이것은 시대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다. 17세기는 실험기구가 과학에 대규모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였다. 과학자들은 기술자, 장인들의 숙련된 경험을 배워 자신들의 이론에 결합하고자 했다. 그 결과 구형자석, 공기펌프, 망원경, 현미경 등 혁신적 기구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 기구들은 새로운 발견의 도구를 넘어, 실험을 과학의 독자적 방법론으로 확립하게 했다. 특히 망원경과 현미경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과학혁명을 견인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빛이 무색이라고 했다. 그러나 뉴턴은 빛에 고유의 색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했다. 먼저 백색광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일곱 색깔의 무지갯빛으로 분리했다. 이것을 다른 프리즘으로 모아 다시 백색광으로 만들었다. 물론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색을 띤다는 사실은 그때도 알려져 있었다. 다만 데카르트는 이 무지개색이 빛의 속성이 아니라, 프리즘이 빛을 변형시킨 결과라고 해석했다. 뉴턴 실험의 핵심은 여러 개의 프리즘으로 빛을 분해했다가 합쳤다는 데 있었다. 만약 무지개색을 만드는 원인이 프리즘에 있다면, 두 개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무지개색이 빛에 원래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굴절률에 따라 분해됨을 알 수 있다.

      

뉴턴은 이 사실로부터 빛이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색에 대응하는 서로 다른 크기의 빛 입자들이 각기 다른 수의 진동을 일으켜 색을 만들어 낸다는 설명이다. 색에 대한 뉴턴의 관심은 망원경의 기술적 결함도 해결했다. 당시 쓰이던 망원경은 렌즈에 색이 번져 상이 흐릿해지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뉴턴은 렌즈를 거울로 바꾼 반사망원경을 제작해 이를 해결했다. 그가 이론적 역량뿐만 아니라 공학적 자질도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프리즘 실험을 하는 뉴턴을 그린 삽화. 그의 이름을 최초로 알린 계기는 빛의 본질을 밝힌 광학 연구성과였다.



     

훅과의 악연

     

뉴턴의 광학 연구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새파란 애송이가 ‘고전의 왕’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문의 기수’ 데카르트를 죄다 논박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무렵 뉴턴은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루커스 수학 석좌교수로 있었다. 많은 사람이 뉴턴의 반사망원경을 보러 케임브리지에 왔다. 이 소문은 왕립학회에까지 들어갔고, 학회는 뉴턴에게 그 신통한 망원경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1671년 뉴턴은 왕립학회에 망원경을 기증했다. 그리고 이 공로로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시골의 젊은 무명 교수가 영국 과학계의 기린아로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뉴턴에게 딴지를 걸고 나선 이가 훅이다. 비전공자는 그 이름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훅은 결코 만만한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용수철을 당기면 그 늘어난 거리에 비례하는 힘이 저항한다는 훅의 법칙을 창안했다. 게다가 ‘영국의 다 빈치’라고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는 최초의 현미경 전문 서적 『마이크로그라피아』를 저술했으며 세포 개념도 처음 사용했다. 실험 큐레이터였던 그가 회원들의 실험 설계와 기기 제작을 도운 덕분에 왕립학회가 전문 과학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훅은 본인의 업적을 인정받는 데에는 민감했다. 특히 뉴턴의 첫 논문은 아주 불쾌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영향을 분명히 받은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뉴턴은 이를 선행연구로 조명하지 않고 대충 넘겨버렸다. 훅은 이 점에 분노했다. 게다가 훅은 뉴턴이 제안한 빛의 입자설이 아닌 파동설을 밀고 있었다. 이래저래 둘은 자꾸만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뉴턴의 반응은 어땠을까?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으나 속으로는 무시했다. 뉴턴은 그 젊은 나이에도 이미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인류사 최고를 다투는 과학적 위업에 가려져서 그렇지, 뉴턴의 인품은 훌륭한 편이 못 됐다. 결국 간사인 헨리 올덴부르크의 중재로 1676년 두 사람은 화해의 편지를 나눴다. 이때 뉴턴이 훅에게 보낸 답장에는 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잘못 이해되는 문장이 들어 있다. “제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흔히 해석되듯 뉴턴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뉴턴은 이 문장에서 ‘거인들(Giants)’의 첫 글자를 굳이 대문자로 썼다. 문법과 상관없이 그렇게 강조한 이유는 훅이 등이 굽고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문장의 숨은 뜻은 이렇다. “내가 다른 선배들에게 배웠을 수는 있지만, 당신처럼 하찮은 사람의 생각을 훔칠 필요는 없다.”  

    

이후 뉴턴은 왕립학회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듬해 훅이 간사가 되자 발길도 끊고 기나긴 칩거에 들어갔다. 뉴턴의 명저 『광학』은 훅이 죽은 다음 해인 1704년에야 나오게 된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훅은 왕립학회 창립 멤버임에도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은데, 나중에 학회장이 된 뉴턴이 없애버려서라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뉴턴은 왕립학회의 선배 훅을 무시했지만, 훅은 그렇게 무시받을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책 『마이크로그라피아』는 최초의 현미경 서적으로서 뛰어난 정확도를 자랑한다.



   

뉴턴의 종합

     

그런 뉴턴도 핼리의 끈질긴 회유와 설득에는 넘어갔다. 마침내 역제곱 법칙 증명의 출판을 결심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왕립학회에 돈이 없었다. 사실 왕립학회는 이름만 왕립이었을 뿐, 그 운영은 별로 로열(Royal)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스폰서 없이 회비로만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회비 부담 능력을 기준으로 회원을 받았다. 자연히 학회 활동의 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1680년대의 발표들을 보면, 과학적 가치는 별로 없고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기이한 현상들을 다루는 것들이 많았다.

    

여기서 핼리의 대인배 기질이 빛을 발한다. 그는 학회에서 받는 급여를 포기하고, 사비까지 써서 출판을 강행했다. 역사에 남을 이 위대한 발견이 한낱 돈 때문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뉴턴도 큰맘 먹고 책으로 내는 거, 3년 동안 논증과 계산을 보완해 더욱 체계적인 형태로 완성했다. 그 사이 핼리는 책임 편집자로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출판을 차질 없이 추진했다.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이른바 『프린키피아』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의 위엄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프린키피아는 라틴어로 원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뉴턴의 이 책은 원리 그 자체로 이해된다.

    

『프린키피아』는 뉴턴의 역학을 집대성했다. 뉴턴은 이 책의 1권에서 세 가지 공리(뉴턴의 운동법칙)를 세웠다. 여기서 출발하여 우주 모든 물체의 운동을 보편적으로 설명해낸다. 보편적이란 모두 같은 원리를 따른다는 의미다. 바로 여기에 『프린키피아』의 위대함이 있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인간에게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 두려움은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자연의 움직임은 신의 뜻, 마법, 우연 등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뉴턴에 이르러 자연의 체계가 정밀한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뉴턴은 그것을 수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보편화시켰다. 뉴턴역학의 기본 법칙인 F=ma가 그 최초의 사례다.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제일 먼저 배우는 이 공식에는 이러한 역사적, 철학적 의의가 있다. 뉴턴의 운동법칙 중에 가장 독창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프린키피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3권에서 다루는 만유인력이다. 만유인력은 말 그대로 모든 물체에 존재하는 끌어당기는 힘을 뜻한다. 영어로는 universal gravitation이다. 그래서 만유인력보다는 보편중력이 원래 의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뉴턴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모든 사물을 끌어당긴다. 그것도 무한히 멀리까지. 물론 멀어질수록 끌어당기는 힘은 약해진다. 뉴턴이 역제곱 법칙을 통해 증명했듯 그 힘의 크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턴역학이 지향하는 보편성의 끝판왕이다. 우주 탄생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우주 공간의 모든 물체에 대해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우주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 그럴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발견을 넘어서는, 세계관의 전환이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천상계와 지상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설을 기초로 지상계의 운동론을 확립했고, 여기에 에테르의 개념을 더해 우주론(천상계)으로 확장했다. 이는 중세의 신학적 권위와 결합하며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뉴턴은 거대한 우주가 단일법칙으로 연결됨을 증명하여 이러한 세계관을 무너뜨렸다. 이미 코페르니쿠스 이래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고한 사상체계에 균열을 일으키던 때였다. 뉴턴은 거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뉴턴은 수학의 보편법칙에 근거하여 인간과 자연, 세계와 우주를 하나로 통합했다.

      

그래서 뉴턴의 시그니처는 ‘종합’이 된다. 뉴턴의 종합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점을 상징한다. 과학사학자 버나드 코헨은 그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째로 이전까지 분리되어 존재했던 주제들이 단일한 과학적 구조로 들어왔다. 즉 뉴턴은 물체의 낙하운동, 조수간만, 행성과 위성의 운동을 하나의 물리 시스템에 근거해서 설명해냈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현상들이 만유인력의 결과임을 보였다.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대결하던 신학문의 경향들 – 갈릴레이, 케플러, 데카르트 등 – 이 제시한 개념, 법칙, 원리 등을 체계화했다. 이로써 힘, 운동, 우주, 천체 등 다양하게 연구되던 경향들이 물리학이라는 학문 범주 안에서 연계성과 통일성을 갖추게 되었다.

『프린키피아』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당시에 있지도 않았던 미적분의 논리를 기하학으로 풀어썼다. 그마저도 라틴어라서 더 어렵다. 어중이떠중이들의 시비를 막으려는 뉴턴의 의도였다.



     

열광과 비판

    

『프린키피아』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7세기 유럽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책의 의미가 잘 와닿는다. 아직 중세적 세계관이 사라지지 않은 때, 뉴턴은 천상과 지상의 원리를 통합하고 천체의 움직임을 한큐에 설명해버렸다. 그 지적 충격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이라면, 하다못해 커피하우스 토론에 끼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알아야 했다. 문제는 『프린키피아』가 역대급으로 난해했다는 것이다. 이는 뉴턴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이 책에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책임 편집자인 핼리조차 2권의 유체역학 부분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책 좀 읽는다는 지식인들은 너도나도 『프린키피아』에 도전했다. 통계학의 시초이자 애덤 스미스의 스승으로 꼽히는 윌리엄 페티는 이 책을 공부하려고 가정교사까지 고용했다. 케임브리지 시절 뉴턴의 은사였던 험프리 배빙턴도 7년의 정독 끝에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열풍을 타고 『프린키피아』는 유럽 지식사회를 강타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덩달아 이를 쉽게 요약·해설하는 개설서들도 인기를 얻었다.


물론 비판자들도 있었다. 여기서도 훅이 등장한다. 훅은 왕립학회 간부로서 『프린키피아』의 원고를 미리 읽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뉴턴이 또 자신의 공로를 빼먹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훅은 1679년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제곱 법칙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에 중요한 힌트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뉴턴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뉴턴은 훅의 불만을 전해 듣고 『프린키피아』 3권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게다가 그나마 훅에 대해 언급했던 부분들을 모조리 빼 버렸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의 비판은 좀 더 이론적이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적폐 청산(?)의 선봉은 누가 뭐래도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 필생의 목표는 중세를 지배한 주술과 미신의 요소를 일소하고 절대 이성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본 뉴턴의 이론은 상당히 기묘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물체 사이에 힘이 작용한다고? 데카르트에게 힘이란 물체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이었다. 서로 닿지 않는데도 원거리를 뛰어넘어 힘이 작용한다는 설명은 신비주의와 다를 바 없다. 데카르트는 우주를 에테르라는 유체가 가득 채우고 있고, 이것이 소용돌이를 일으켜서 천체가 회전한다고 보았다. 물로 가득 찬 수조를 회전시키면, 물 위에 뜬 종이배도 회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처음에 과학자들은 뉴턴보다 데카르트를 지지했다. 소용돌이가 만유인력보다 논리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뉴턴은 신비주의자라는 의심도 꽤 많이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뉴턴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일단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은 케플러의 법칙과 어긋났다. 더구나 소용돌이는 저항이 작용하므로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 또 그 소용돌이를 가로지르는 혜성의 궤도 역시 설명할 수 없다. 반면 뉴턴주의자 핼리는 혜성의 궤도를 완벽히 계산해냈다. 1682년 핼리는 혜성을 목격했고, 그 궤도가 1607, 1531, 1456년에 기록된 혜성과 매우 흡사함을 알아냈다. 핼리는 『프린키피아』를 참조해 이 혜성이 75~6년의 공전주기를 가지며, 1759년 3월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핼리는 그때까지 살지 못했으나 예측은 적중했다. 이것이 바로 핼리 혜성이다.

핼리 혜성은 뉴턴 이론의 정확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뉴턴이 신비주의자라는 세간의 의심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뉴턴은 연금술과 신학 연구에 심취해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힌 이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자타공인 뉴턴 덕후였던 케인스는 평소 뉴턴의 미발표 저작들을 수집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케인스는 이 방대한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뉴턴이 평생 수학과 물리학보다는 연금술과 신학 연구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음을 알아냈다. 이런 이유로 케인스는 뉴턴을 가리켜 ‘최후의 마술사’라고 했다. 과학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뉴턴의 만유인력 아이디어는 원격 작용인 자석의 자력 현상에서 비롯된, 연상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뉴턴이 살았던 17세기는 근대화학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대다.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마법적 사고가 여전히 큰 영향을 발휘했다. 따라서 자력처럼 거리를 뛰어넘는 신비적 힘이 있다는 믿음이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로써 만유인력 개념이 정립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야마모토의 설명이다.  



   

모든 영예를 누린 지식인

     

뉴턴은 과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은 뉴턴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 따라서 뉴턴을 과학혁명의 최정점이자 근대과학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나타난 수많은 과학자들도 뉴턴의 패러다임을 따랐다. 18세기의 과학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프린키피아』의 법칙들을 현실에서 확인해나가는 시기였다. 멀리 보면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과 1977년 보이저 1, 2호의 태양계 탐사도 『프린키피아』를 기원으로 삼는다. 그만큼 뉴턴이 확립한 자연법칙과 방법론은 수백 년의 과학 패러다임을 지배했다. 그 권위의 아성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아인슈타인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뉴턴은 학문은 물론 현실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왕립학회장, 조폐국장, 국회의원이라는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조폐국장 뉴턴은 무려 25년이나 재직하면서 과학자 못지않은 위업을 이루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은화의 테두리를 깎아서 팔아먹는 일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액면가보다 가치가 낮은 은화가 유통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은화의 액면가보다 재료비가 비싸지자, 은화를 대량으로 확보해서 은으로 되파는 이들도 등장했다. 이에 뉴턴은 새로운 은화를 제조해 이미 못 쓰게 되어버린 옛 은화를 대체하기로 했다. 새 은화는 테두리를 깎아내지 못하도록 톱니 모양을 새겨 넣었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는 동전 제조 방식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또한 최신 합금 기술을 도입하여 은화의 위조를 어렵게 만들기까지 했다. 연금술을 진지하게 연구했던 뉴턴다운 개혁이었다.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테두리를 톱니모양으로 깎는 주화 제조법도 뉴턴의 작품이다.

    

이렇듯 뉴턴의 삶은 모든 면에서 영예로웠다. 20대 초반에 근대과학을 확립하는 업적을 이룬 그는 (훌륭하지 못했던 인품과는 별개로) 세상의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그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중 뉴턴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아마 핼리가 『프린키피아』의 서문에 쓴 헌시일 것이다.

    

“신성한 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자

어느 누가 뉴턴보다 더 가까이 신에게 다가갔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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