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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an 08. 2024

회의를 통한 확실성의 탐구, 데카르트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3)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람시의 이 언명은 위기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보여준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도 비슷한 논리를 폈다. 과학 발전을 패러다임 교체로 설명한 쿤은, 기존 패러다임이 균열을 일으키고 새 패러다임이 등장하기 전까지를 과학의 위기로 본다. 이렇듯 분야가 전혀 다른 두 학자가 비슷한 역사 인식을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요컨대 역사의 위기란 단절과 혁신, 그 사이의 시간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봐도 될 것이다.

     

17세기의 유럽이 그러했다. 중세와 근대가 겹치는, 사라지는 낡은 것을 대체할 뭔가가 드러나지 않은 때였다. 그 중심에 30년 전쟁(1618~1648)이 있었다. 이 전쟁은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각국의 세력 다툼으로 변모했으며, 결국은 중세의 지배 질서를 와해시켰다. 귀족들은 대거 소멸했고, 신성로마제국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 자리를 신흥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프랑스, 스웨덴, 프로이센, 네덜란드 등이 강국으로 떠오르며 오늘과 비슷한 국경선이 만들어졌다. 종전과 함께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다. 그런데 전쟁으로 무너진 것은 기존 정치만이 아니었다. 중세 지배의 정당성을 담보했던 사상과 관념도 함께 붕괴했다. 본래 전쟁이란, 정치를 넘어 사람들의 의식과 세계관까지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30년 전쟁.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모습에서 당시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불안의 시대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바로 이 시대를 관통한 지식인이다. 데카르트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합리주의와 이성이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고 절대적인 지식을 추구했다. 단 0.01%의 오류도 없는 확고부동한 철학의 토대를 쌓으려 했다. 한 세대 전의 베이컨이 그랬듯, 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청산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다만 그 방법이 달랐다. 경험의 데이터를 조직해 일반화된 지식으로 나아간 베이컨과 달리, 데카르트는 보편타당한 제1원리에서 출발하는 지식의 연쇄적 체계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의 불안한 생활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30년 전쟁을 겪으며 유럽은 각자도생의 사회로 내몰렸다. 공동체는 제 기능을 못 했고, 지식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는 학문의 부재가 아닌, 과잉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인쇄술과 르네상스를 계기로 많은 학문이 물밀 듯 들어왔고, 유럽인들은 고대에 생각보다 다양한 사상이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적 권위에 반하는 흐름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코페르니쿠스도 추종했던 신플라톤주의였다. 하지만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학설들을 단일한 체계로 종합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거대한 지적 권위의 부재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누구도 확실히 말해주지 못하는 시대였다.

      

이 같은 위기를 심화시킨 것이 피론주의였다. 고대 철학자 피론의 극단적 회의론에 기초를 둔 이 사상은 어떤 것도 믿지 말고, 진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학문, 지식, 교육 등은 죄다 소용이 없다. 참다운 지식은 있을 수 없고, 있다 해도 분명한 기준이 없다. 피론주의는 30년 전쟁 발발 직후인 1620년대에 특히 맹위를 떨쳤다. 기존의 질서, 관념, 권위에 대한 부정과 파괴는 철저했으나, 새로운 지적 대안은 부재했다. 16~17세기 과학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지식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데카르트의 이론적 출발점도 바로 여기였다. 즉 그는 현실과 학문을 분리하지 않았던 지식인이었다. 데카르트 삶의 궤적을 보면 이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스무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비유대로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입대하여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이 경험이 그의 사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전역 후에는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로 가서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참고한 학자들은 갈릴레이, 베이컨, 하비 등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백면서생이 아니었다. 현실의 위기와 정면으로 대결하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개척하려 했던 철학자였다.

30년 전쟁 종전과 함께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위)과 그 결과 그어진 유럽 각국의 국경선(아래). 이는 유럽에서 중세의 질서가 붕괴하고 근대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된다.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는 절대 진리를 궁극의 목표로 삼아 회의론으로 대표되는 지식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즉 확실한 것을 진리로 세움으로써 불안과 혼란을 벗어난 새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독특했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의 논리적 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그들을 논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회의는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다만 회의 자체를 진리로 받아들인 피론과는 달랐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그저 진리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었다.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비유컨대 적의 무기로 적을 쓰러뜨리는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에 따르면 진리란 전혀 의심의 가능성조차 없는, 100% 확실한 사실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지구는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이다”라는 명제는 진리인가? 아마 대부분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으로 의심해보면 그렇지 않다. 태양계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일부 행성이 파괴되었을 수 있고, 그 정보를 나는 아직 모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떤 가능성도 남기지 않고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여 최후까지 남는 지식이 진리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방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인간이라면 으레 가진 관습, 경험, 선입견 등이 그렇다. 특히 데카르트는 베이컨과 달리 경험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감각 능력은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접해도 사람마다 달리 해석하는 경우는 아주 많다. 몇 년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불붙었던 드레스 색깔 문제를 떠올려 보라. 똑같은 드레스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파검(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흰금(흰 바탕에 금색 줄무늬)이라 했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이 볼 수 있는 만큼만 보는 존재다. 하긴 그 정도만 해도 다행일지도 모른다. 심한 경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feat. 정치병 환자)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데카르트는 감각과 경험만큼 못 믿을 것도 없다고 단언했다.



     

이성에 대한 확신

     

그럼 어떻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데카르트에 의하면, 그것은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있다. 데카르트는 이를 이성 안에 본래 존재하는 생각이라는 뜻에서 ‘본유관념’이라 했다. 대표적인 예가 수학의 공리다.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 개다. 두 점을 최단 거리로 이으면 직선이 된다. 이런 명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누가 보아도 확실하다. 이러한 명징성이 있어야만 참다운 지식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화신답게 이성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검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수행했다. 우선 자신이 사유하는 의식 체계는 실은 악마의 조작이라는 극단적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아무리 악마가 방해해도 참일 수밖에 없는 명제가 있는지 탐구해보았다. 절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나는 의심하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의심은 곧 생각의 발로이다. 내가 나로 존재함은 신체의 감각 기관이 작동해서가 아니라, 내 이성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어서인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명제가 성립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이 명제를 제1원리로 삼아 거대한 지식의 체계를 쌓아 올렸다. 이것이 합리주의 철학이다. 합리란, 이름 그대로 이성에 부합하면 진리가 된다는 의미이다.

    

합리주의자로서 데카르트는 수학이 진리의 요건을 갖춘 이상적인 학문이라고 보았다. 수학만큼 확실성과 명징성을 갖춘 학문이 없어서 그렇다. 철학, 문학, 예술 등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도 수백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에서는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하며 확실한 정답을 도출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학과 이성은 찰떡궁합이다. 합리주의는 확고한 진리를 제1원리(대전제)로 구축하고 이로부터 소전제들을 도출하는 연역법을 쓴다. 이것도 수학이 공리로부터 증명을 도출하는 방법과 같다. 데카르트는 아예 수학으로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원대한 비전까지 제시했다.

     

수학자 데카르트를 대표하는 업적은 바로 직교좌표계를 만든 것이다. x축, y축이라는 명칭도 그가 고안한 것이다. 천장에 붙은 파리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데카르트 자신이 뛰어난 수학자였다. 오늘날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조상님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수학, 물리학, 의학 등에서도 철학 못지않은 업적을 쌓았다. 1637년 출간된 『방법서설』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책이 데카르트의 대표작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풀네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래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라는 아주 긴 제목의 책이다. 요컨대 데카르트는 철학은 물론 수학과 과학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학문의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방법서설이라고 할 때는, 이 책의 총론만을 의미한다. 여기서 확립한 철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 등의 각론까지 나아가는 것이 데카르트의 목표였다. 즉 보편의 근본 법칙에서 출발해 당시 과학혁명을 풍미했던 첨단 과학의 지식까지 아우르려 했다.



    

인간의 전체 복리를 도모하는 학문

    

『방법서설』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논점들을 담고 있다. 총 6부로 구성되며, 그 주제는 앞서 말했듯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학문을 포괄한다. 책을 쓴 동기이자 가장 중심적인 생각은 마지막 6부에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학문의 목적이 “인간의 전체 복리를 도모”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삶에 유용한 지식은 실제적이며, 그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을 알고 이를 적절한 곳에 사용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펼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된다”. 이 문장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자연을 통제하고 개조함으로써 인간에게 유용한 결과를 얻겠다는 근대적 세계관의 맹아가 여기서도 보인다.

데카르트의 집필 모습(왼쪽)과 『방법서설』표지(오른쪽). 데카르트가 밟고 있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다. 그 또한 베이컨처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사변성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도 베이컨이 그러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경향과 단절하는 신학문의 기수였다. 물론 베이컨과 데카르트 사이에는 영국과 대륙,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귀납법과 연역법이라는 경향적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궁극의 차원에서는 서로 통했다. 둘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에 두고, 기존 자연철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켜,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학문의 체계를 세우려 했다. 이렇듯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자연을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기계처럼 대했다는 점에서 모두 기계론자였다. 결국 그들의 철학은 인간이 자연이라는 기계를 효과적으로 써먹기 위한 매뉴얼이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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