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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30. 2023

근대정신의 기수, 베이컨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2)

대한민국 정규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나 익숙한 문제가 있다. 한번 풀어보자.


정답은 2번 종교의 우상. 프랜시스 베이컨의 4대 우상, 다들 기억나시는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정말 열심히 외웠다. 그만큼 시험의 단골 문제였다. 윤리나 사회탐구는 물론 논술에서도 그랬다. 나도 논술강사 시절, 이건 꼭 나온다고 자주 강조했었다. 그런데 이 4대 우상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다. 베이컨이 중요한 학자인 건 맞다. 근대라는 시대정신을 최선두에서 개척했던 인물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그의 중요한 저작과 이론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다소 엉뚱하게도 4대 우상이 그의 대표 학설처럼 되어 있다. 아마 전공자가 아니라면, 일단 베이컨을 아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나마 아는 사람도 죄다 이 4대 우상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베이컨은 근대정신의 기수이자 체현자이다. 그는 과학혁명이 태동시킨 과학주의적 사고를 근대의 정신적 기초로 놓았다. 때는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고 종교개혁이 온 유럽을 휩쓸던 무렵이었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로 제국의 여명기이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식민지를 개척하고, 국내에서는 문화예술이 황금기를 맞았다. 전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후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대표했다. 그만큼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뛰어난 인물들이 넘쳐났다. 베이컨도 빼놓을 수 없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재학 때부터 일찌감치 엘리자베스 1세의 눈에 들었고 후일 법률고문으로 위촉되었다. 후임인 제임스 1세 때는 더 승승장구했다. 법무장관으로 발탁되었고,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리고 법률가 최고직인 대법관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잘 나가면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베이컨은 대법관이 된 3년 만에 정적들에 의해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정치 생명이 끝났다. 정계 은퇴 뒤 베이컨은 집필 활동에 집중하며 여생을 보냈다.

베이컨이 말년에 저술한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기술 발전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렸다. 책에 삽입된 이 그림은 20세기에나 보편화될 음향기술을 놀라운 예지력으로 표현했다.

   

베이컨은 정치가보다는 사상가로서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대한민국 단골 시험 문제인 4대 우상 비판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만 좀 더 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베이컨의 지성사적 의의는, 그가 ‘근대의 설계자’라는 데 있다. 근대정신을 향한 베이컨의 기획은 철학과 과학을 망라한다. 이 지점에서 극복 대상이 되는 존재가 아리스토텔레스다. 중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과 사상의 왕이었다. 당시 서양인의 인식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이컨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면 뿌리 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과 단절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급진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기했다. 이를 자연관, 과학적 방법론, 학문론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목적론 vs 기계론

     

중세를 지배한 자연관의 핵심은 이러했다.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은 뚜렷한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유기체다. 이걸 목적론이라고 한다. 특히 이는 자연철학이 신학과 연결되는 매개가 된다. 자연이 움직이는 목적을 과연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신 말고는 불가능하다. 목적론에 따르면 자연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신이 정한 바대로 자연이 움직이는데, 인간이 거기서 뭘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은 그저 관조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세까지 인간은 그렇게 자연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왔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연현상에 목적 따위는 없다고 보았다. 자연이란 그저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왜(why)?’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자연이 운동하는 이유는 (마치 기계가 그러하듯) 원래 그렇게 프로그래밍이 되어서다. 그럼 자연은 왜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가?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how)?’다. 즉 자연이 운동하는 목적이 아니라, 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이 곧 기계론이다. 이름 그대로 자연을 기계처럼,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을 넘어서는, 역사성을 내포하는 문제제기이기도 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기계론에 따르면 인간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을 통제하고 인간에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떨어진 관조적 삶을 벗어나, 자연에 개입하고 조작하는 실천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연역법 vs 귀납법

     

베이컨은 지식을 얻는 방법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려 했다. 베이컨이 타깃으로 삼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논리학(Organon)』이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에 기초한 연역법을 제시한다. 연역법은 대전제, 즉 구(舊) 정보로부터 소전제를 거쳐 신(新) 정보를 추론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필연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전제들의 인과관계를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베이컨은 이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그는 제목부터 『논리학』을 겨냥한 저작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베이컨이 보기에 연역법은 절대적으로 옳은 제1원리로부터 모든 문제가 논증된다고 보는, ‘닫힌 체계’였다. 즉 연역법은 논증의 전제들이 참일 때만 올바른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정작 그 전제들의 진위 판별에는 무력하다. 여기에는 논리보다는 권위가 더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피상적 관찰로부터 성급하게 일반화시킨 법칙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이러한 논증이 참이라 해도, 결론의 타당성과 무관하게 지식의 확장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논증은 법정 변론이나 논쟁 같은 말싸움에서나 유용하다. 미지의 자연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과학의 방법으로는 부적합하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 겨냥한 저서 『신기관』에서, 연역법의 관념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지식의 방법으로 귀납법을 제안했다.

     

베이컨은 귀납법을 제안했다. 그 핵심은 이렇다. “끊임없이 개개의 사례로부터 낮은 단계의 일반 명제로, 여기서 다시 중간의 일반 명제로 차원을 높여가서, 마침내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 도달하는 것”. 그러니까 그저 경험이 많이 쌓이면 지식이 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베이컨의 귀납법은 수많은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해,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여, 마침내 가장 일반화의 수준이 높은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방대한 데이터의 수집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가려내 명확한 기준에 따라 분석·종합해내야 한다. 그만큼 정교한 실험 설계와 실험자의 주도면밀함이 중요하다. 이렇게 획득한 지식은 수집된 사실의 단순 합을 넘어서는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 또한 처음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의 예측에도 유용하다.



     

사변적 탐구 vs 실질적 기술

     

베이컨은 학문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전혀 다르게 접근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자연을 추상화, 관념화하여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이었다. 연역법도 이렇게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지식을 정당화할 뿐이다. 그러니 학문이 사변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베이컨에게 학문이란 실질적 기술이어야 했다. 즉 경험과 현실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어, 인간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다. 베이컨이 강조한 진보(advancement)와 진전(progression)의 개념은 당시에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학문이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익혀서 진리를 깨닫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앎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베이컨은 학문에 인류의 진보라는 분명한 목적성을 도입했다. 1605년 저작 『학문의 진보(Advancement of Learning)』에 이러한 생각이 집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베이컨은 인류 복지에 이바지할 조작적 지식의 이념과 처방을 제시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자연에 대한 실천적 삶의 지향에 따른 것이다. 이 실천을 가능케 하는 학문이 경험적 지식에 근거한 과학이 된다.

      

저 유명한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potentia est)”라는 테제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흔히 생각하듯 아는 것이 많아야 출세도 하고 권력도 누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주어인 ‘아는 것’, 즉 라틴어 scientia는 과학(science)을 의미한다. 서술어의 ‘힘’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 자연을 지배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문장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규정을 함의한다. 인간이 과학을 통해 자연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원대함은 『학문의 진보』 표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에는 커다란 범선이 지브롤터 해협 어귀의 헤라클레스 기둥을 지나 먼바다로 나가는 그림이 있다. 지브롤터 해협은 유럽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관문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학문적 기획을 신세계로의 문을 연 대항해에 비유한 것이다.

베이컨의 대표작 『학문의 진보』 표지. 과학의 힘으로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원대한 학문적 기획을 지브롤터 해협 밖으로 출항하는 대항해 범선에 비유했다.

     

근대과학의 새로운 세계관 

    

베이컨주의가 근대과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16~17세기 과학혁명은 베이컨이 세팅한 새로운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제는 성현들의 말씀보다 실험과 관찰로 증명되어야만 지식으로 인정받았다. 이것은 학문의 민주화, 대중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학문은 귀족과 식자층의 고귀한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라틴어로 된 경전을 읽고 되새기면서 고고하게 그 뜻을 깨우치려 했다. 손과 기구를 써서 자연을 직접 주무르는 것은 비천한 일이었다.


하지만 베이컨 이후로 이런 인식이 달라졌다. 과학혁명의 선구자들은 르네상스를 거치며 성장한 기술자, 장인, 화가, 외과의사 등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뭐든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결과 현미경에서 진공펌프까지 다양한 실험기구들이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이걸로 위험한 화학실험에서 끔찍한 인체 해부까지, 자연에 직접 손을 대는 온갖 연구를 하였다. 더럽고 지저분해서, 기존의 식자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근대과학은 16세기 성장한 기술자,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발전했다. 초창기 실험 기구인 로버트 보일의 진공펌프(왼쪽)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오른쪽)

    

이로써 이전까지 철학과 구분되지 않았던 과학이 독자적 학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과학혁명은 실험과 관찰을 과학의 고유한 방법으로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 포문은 천문학이 열었다. 하지만 이때의 천문학은 연구 방법에서까지 혁명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 해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적 유산을 상당 부분 답습했다. 과학혁명에서 실험은 천문학 같은 전통적 학문보다는 기존에 없던 분야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열, 소리, 빛, 전기, 자기, 기체 등이 대표적 예다. 이 분야들에서 물리학과 화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했다. 

     

이러한 방식의 과학 연구는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여러 과학자의 협동이 필요한 일이었다. 1660년 출범한 최초의 근대 과학단체, 런던 왕립학회에 모인 이들이 대부분 베이컨주의자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베이컨 사후 출판된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에 그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 과학 연구에 필요한 시설과 재정을 지원받아, 인류 복지에 기여할 지식을 얻는, 과학자들의 이상향 ‘솔로몬의 집’이다. 오늘날 많은 국가와 기업이 운영하는 과학 연구소도, 따지고 보면 베이컨의 이러한 비전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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