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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04. 2023

경계에 선 과학자, 코페르니쿠스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1)

1514년 교황 레오 10세는 난감한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다. 달력과 실제 날짜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당시 쓰던 달력은 율리우스력으로,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들었다. 율리우스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 삼아 1년을 365.25일로 정했다. 지구의 공전주기는 약 365.24219일이니 1년에 약 0.0781일의 오차가 생긴다. 이걸 1,500년 넘게 사용하다 보니 오차는 10일 가까이 누적되었다.


달력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었을까? 이는 기독교의 축제인 부활절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크리스마스는 날짜가 12월 25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부활절은 그렇지 않았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춘분 이후 첫 보름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결정했다. 초창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매년 율리우스력의 오차가 쌓이면서, 부활절이 점점 더 보름과 멀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래서는 교회의 권위가 실추될 수도 있었다.



     

달력 문제와 기독교

     

레오 10세는 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회기 중에 한 천문학자에게 자문을 의뢰했다. 그러나 천문학자는 자료 부족을 이유로 고사했다. 얼마 있지 않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고, 달력 이슈는 종교개혁에 파묻혔다. 1575년이 되어서야 달력 논의가 재개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달력 문제를 해결해 종교개혁으로 실추된 가톨릭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7년이 지난 1582년, 오랜 논의 끝에 새로운 달력이 탄생했다. 새 달력은 오차로 누적된 10일을 아예 없애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1582년 10월 4일의 다음 날은 10월 15일이 되었다. 부활절 날짜를 유지하면서도, 오차를 1년에 26초로 줄인 일거양득의 결과였다. 이것이 현재 쓰는 그레고리력이다.

1582년 10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왼쪽)가 그레고리력을 반포함으로써 달력에서 열흘이 사라졌다(오른쪽).


레오 10세의 요청을 고사한 천문학자가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프라우엔부르크의 성당 참사회원(관리자)이었다. 그런데 어찌 감히 교황의 자문을 거절했을까? 진짜 이유는 율리우스력의 기초가 된 천동설(지구중심설)에 있었다. 그는 천동설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서 정확한 달력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짧은 해설』이라는 논문에서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창한 터이기도 했다. 다만 레오 10세가 불렀을 때는 연구가 아직 불완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자문할 수는 없었기에 다른 이유를 들어 피해 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완성되는 데에는 30여 년이 더 필요했다. 교회는 코페르니쿠스 사후 그의 계산법을 따라 그레고리력을 만들었고, 수백 년을 이어온 골칫거리를 해결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토룬 태생이다. 토룬은 13세기 튜튼 기사단이 건설했고, 한자동맹의 일원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튜튼 기사단은 현대 독일의 원형이 되는 프로이센을 건국한 이들이기도 하다. 원래 폴란드 영토였던 토룬은 18세기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다시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 때문에 한때 코페르니쿠스의 국적은 논란이 되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그가 독일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실제로 국립독일박물관의 명예의 전당은 코페르니쿠스를 위대한 독일 과학자로 소개한다. 물론 오늘날 코페르니쿠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폴란드인이다.

바르샤바의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앞의 코페르니쿠스 기념상. 그는 프레데리크 쇼팽과 함께 폴란드가 세계에 자랑하는 인물이다.



     

이탈리아라는 배경

     

코페르니쿠스는 본래 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신부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교회의 달력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시대의 난제에 도전하기에는 학문의 변방 폴란드는 척박한 곳이었다. 그래서 1496년, 외삼촌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7년 만에 페라라대학교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파도바대학교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달력 문제를 연구한다면서 왜 의학을 공부했을까?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을 불가분으로 여긴 16세기에 천문학(astronomy)과 점성술(astrology)은 하나의 학문이었다. 의학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인들은 인체도 태양, 행성, 별자리의 영향을 받으며, 천체 관측을 통해 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천문학자는 점성술사이면서 의사이기도 했다.


15세기 이탈리아는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였다.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은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상인과 부자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앞다퉈 책을 사들였다. 마침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직후라 온갖 종류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학구적 분위기에서 지식인이 우대받았고, 새로운 사상도 자유롭게 토론되었다. 학자와 예술가들이 먹고살 걱정 없이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부자들도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 예다.


특히 그리스·로마 고전의 복원과 번역이 대유행했다. 중세인들은 오랫동안 종교와 생활이 일체화된 삶을 살았다. 기독교의 교리는 사람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규정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그리스·로마 고전은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식인들은 이를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번역했고, 알기 쉽게 가공된 지식은 사회 곳곳으로 대중화되었다. 그러자 평범한 학자, 예술가, 기술자, 의사, 상인 등이 새로운 지식인층으로 떠올랐다. 이들이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꽃피운 주역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바로 이러한 르네상스와 인쇄술 혁명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의 근대 초기 모습(위쪽)과 현대(아래쪽). 파도바는 르네상스 운동의 지적 거점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베살리우스 등 석학들이 이곳에서 연구했다.



     

오해와 진면목

     

코페르니쿠스는 혁명과 단절의 아이콘으로 곧잘 상징화된다.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전면 폐기하고, 지동설이라는 근대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철학자이면서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이마누엘 칸트가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명명하면서 이러한 인식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럼 지동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오로지 코페르니쿠스만의 순수 창작인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일단 지동설은 천동설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호기롭게 프톨레마이오스를 저격하며 지동설을 내놓았으나, 수학적으로는 천동설이 더 정확했다. 그의 지동설 체계는 실제 관측 결과와 어긋났고 곳곳에 모순이 있었다. 그러자 코페르니쿠스도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용한 복잡한 수학적 보완 장치 – 주전원, 이심원 등 - 를 끌어다 자신의 체계를 수정한 것이다. 결국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다르다는 대전제를 빼면, 세부 논리와 방법론에서 두 체계는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가 혼자 힘으로 지동설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성취에는 적어도 선배 세 명이 남긴 유산이 결정적이었다. 첫째는 레기오몬타누스로 알려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뮐러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집대성된 『알마게스트』를 간결히 정리하고 계산식을 보완한 번역본을 내놓았다. 이것이 인쇄된 해가 코페르니쿠스가 이탈리아에 온 1496년이었다. 이 책 덕분에 천문학의 부흥이 일어났고, 유학생 코페르니쿠스도 쉽게 천문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둘째는 플라톤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일색의 주류 학풍에 반발해 플라톤을 복권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조화로운 질서를 이룬다”라는 것이 이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은 코페르니쿠스가 복잡한 천동설을 기각하고, 단순 명료한 우주체계를 구상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셋째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다. 그는 기원전 3세기에 기하학으로 태양이 지구보다 훨씬 크고 멀리 있음을 계산해냈다. 그러니까 작은 지구가 큰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다는 결론이다. 역사상 최초의 지동설인 셈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르네상스의 절정기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면서, 이러한 흐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동설은 그 학문적 전통의 자연스러운 산물이었다.

기원전 3세기 아리스타르코스가 계산한 태양, 지구, 달의 크기. 역사상 최초의 지동설이었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기독교로부터 핍박받았다는 인식 역시 그렇다. 이는 주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교황청의 금서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이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직전에야 나왔다는 점도 핍박설을 부추긴다. 코페르니쿠스가 교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출간을 망설였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 문제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금서 지정은 1616년으로, 책이 나오고 73년이나 지난 뒤다. 그만큼 교회는 이 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바티칸에서 지동설 강의를 듣고 코페르니쿠스에게 큰 호의를 보였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평생 가톨릭에 봉직한 성직자였다. 이것은 그가 체현하는 ‘근대를 연 혁명가’의 이미지와는 상반된다. 그 역시 교회의 기득권을 누린 보수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황에게 헌정한 것도 당연했다. 1582년 교황청이 반포한 그레고리력도 코페르니쿠스의 계산법을 응용해 만들어졌다. 지동설의 우수성을 교회도 인정한 셈이다.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출간을 미룬 이유가 교회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평생의 역작을 달랑 400부(그마저도 다 안 팔렸다)만 인쇄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초판 400부만 찍었고, 현재 300부 정도가 남아 있다. 그중 한권이 2008년 경매에서 220만 달러(약 29억 원)에 팔렸다.




경계를 넘어서

     

코페르니쿠스가 표상하는 바는 ‘혁명’보다는 ‘경계’일 것이다. 그는 패러다임 전환의 경계에 서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등속원운동 개념이다. 고대인들은 원이야말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도형이라고 믿었다. 코페르니쿠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전제인 등속원운동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바로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관측 결과와 오차를 보인 이유였다. 또한 코페르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이 공유했던 태양숭배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에 가까웠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도 이런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이 발견된다. 이것이 그가 지동설을 신봉한 또 하나의 이유였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천동설 체계(왼쪽)와 지동설 체계(오른쪽). 코페르니쿠스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철학적 직관, 신비주의적 믿음에서 지동설을 신봉했다.

    

경계를 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후배들 몫이었다.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은 요하네스 케플러가 밝혀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해서 지동설의 경험적 근거를 확보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작 뉴턴이 수학으로 우주와 행성의 운동 법칙을 설명해냈다. 100여 년에 걸친 이 과학혁명의 결과로 지동설도 비로소 확고한 과학적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후일 토머스 쿤은 코페르니쿠스를 가리켜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라고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담지하는 경계의 의미를 상기해보면, 이 표현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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