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Nov 15. 2023

과학자와 과학단체의 탄생

과학의 전문화와 국가의 지원

아마추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근대 초기의 과학 발전은 대부분 아마추어의 덕이었다. 예컨대 근대적 원자론을 제창한 존 돌턴(John Dalton)은 교사였다. 산소를 발견한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는 목사였고, 미생물학을 개척한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Antoni van Leeuwenhoek)은 무역상이었다. 이 사람들은 체계적인 과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 따라, 기구들을 직접 만들어 집에서 실험해보았다. 그럼에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견을 이뤘다. 물론 아직 과학의 발견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이 블루오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과학이 점점 발전하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전문 과학자들이 아마추어들을 대체했다. 이들은 연구를 대가로 급여와 지원금을 받는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 또한 개인으로 분산됐던 이전 세대와 달리, 뚜렷한 목적을 갖는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집단연구를 위한 과학단체는 17세기에, 직업적 과학자는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사회정치적 요인, 특히 국가의 지원과 맞물리며 일어난 변화였다. 당시 서양의 국가들은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에 직면해 있었다. 부국강병은 이에 필요한 최우선의 정책과제였다. 과학은 부국강병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부상했다. 본래 자연철학에 가까웠던 과학은 베이컨 등이 규정한 실용적 목표, 기술적 성격을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 방향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에게 유용한 장치를 만들고 생활을 개선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로써 과학은 산업 발전과 전쟁 수행의 지적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치가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과학 지식과 인재들을 체제로 포섭하고자 했다.



     

국왕이 인증한 과학단체

     

최초의 근대적 과학단체는 영국의 런던 왕립학회다. 1660년 창립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는 대부분 이곳의 회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권위가 대단하다. 시작은 소박했다. 17세기 신학문으로 떠오르던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일군의 학자들이 만든 연구모임이 그 모태다. 혼자서 과학을 연구하던 이들은 함께 모여서 실험하고 토론하고 논문도 쓰자고 의기투합했다. 2년 뒤에는 국왕 찰스 2세의 헌장도 받게 된다. 사실 찰스 2세는 성군이라 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과학 애호가였기에 Royal이라는 명칭을 허락했고, 스스로 회원이 되었다. 그는 1675년 항해술과 천문학 발전을 위한 그리니치 천문대를 세우기도 했다.


왕립학회의 정신적 지주는 베이컨이었다. 일찍이 그는 ‘솔로몬의 집’이라는 과학자들의 이상향을 제안한 바 있었다. 그것은 시설과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실험 연구를 수행하고, 인류 복지에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왕립학회는 이러한 비전을 현실화한 공동체였다. 조직의 모토 또한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Nullius in verba)”로 정했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베이컨의 철학을 집약한 문구였다.

토머스 스프랫이 쓴  『왕립학회의 역사』의 표지. 그림 가운데 찰스 2세의 흉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과학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한 베이컨이 있다. 주위에는 여러 실험도구들이 있다.


다만 이름과 달리 실제 운영은 왕립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립학회는 사적 모임으로서 회원들의 회비에 따라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창기 성장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일단 돈이 있어야 뭘 해도 할 것 아닌가. 왕립학회는 회비를 많이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위주로 회원을 받았고, 그러다 보니 연구 활동의 질도 낮아졌다. 1680년대 왕립학회의 업적을 보면, 과학적 가치는 별로 없고 호기심 위주의 기이한 현상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687년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왕립학회에서 출간한 것이다. 뉴턴은 이미 1671년 광학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학회의 거물이었던 훅과 표절 시비가 붙으면서 10년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핼리의 끈질긴 설득 끝에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간하기로 하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왕립학회에는 책을 인쇄할 비용조차 없었다. 결국 핼리가 사비를 들여 출간을 도왔고, 인류사 불멸의 명저 『프린키피아』는 왕립학회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로써 왕립학회는 과학자들의 한담 모임에서 전문 학술단체로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과학단체가 출범했다. 런던 왕립학회보다 6년 늦은 1666년, 파리에서도 과학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도 과학자들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왕립학회와 유사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과학자들이 만든 왕립학회와 달리, 과학아카데미는 정부가 기획했다는 것이다. 특히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베르는 70명에 달하는 이 과학자들의 모임이 잘 되려면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국부 증진을 위해 강력한 중상주의를 추진하던 콜베르의 정책노선과 같은 맥락의 것이었다. 그 결과 회원들은 국왕으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안정적인 연구활동을 했다. 물론 이는 국왕 루이 14(Louis XIV)의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후원 덕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정부 시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지구의 크기 측정 같은 대규모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과학자가 정부 관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이런 탄탄한 지원을 바탕으로 뛰어난 과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프랑스의 뉴턴’이라 불린 라플라스를 필두로, 장 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조제프루이 라그랑주(Joseph-Louis Lagrange) 등을 들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계몽주의 전파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는 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문과생들의 정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그 이론적 원천은 이과생들의 사고체계, 즉 과학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와 군주의 지배는 논리적 정당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성적 개인들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합리적 체제를 꿈꿨다. 프랑스 절대왕정은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자를 우대했지만, 시민혁명의 사상적 토대에 기여하는 역설적 결과도 초래한 것이다.

파리 과학아카데미를 이끌었던 라부아지에는 화학의 독자적 체계를 세운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혁명 정부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겪는다.



     

국가가 키우는 직업 과학자

     

18세기말이 되면서 과학도 전문직업으로 본격화했다. 근대사의 분기점인 프랑스대혁명이 그 중요한 배경이 된다. 1789년 혁명의 결과로 1792년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자 혁명의 확산을 경계한 주변 국가들이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압박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프랑스에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대거 부족해졌다. 이미 혁명 정부는 절대왕정이 후원한 과학아카데미의 학자들을 여러 명 단두대로 보낸 바 있었다. 근대화학의 아버지라 불렸던 라부아지에가 대표적이다. 간신히 처형을 모면한 이들은 망명을 택했다. 반면 대프랑스동맹과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포병과 공병의 수요가 늘었다. 공업 원료의 수입도 끊겨서 화약 등의 자급체제도 시급히 확립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가 창설되었다. 이곳은 한 마디로 혁명 정부의 과학기술자 양성 기관이었다. 이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인물이 수학자 가스파드 몽주(Gaspad Monge)다. 몽주는 혁명 이념에 따른 국가의 봉사자를 양성하고,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에 출신 배경보다는 수학과 과학 지식을 평가해서 학생들을 선발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입학생들은 혁명 정신은 물론 물리학, 화학, 해석학, 기계공학, 건축학 등을 학습했다. 몽주를 비롯하여 라플라스와 라그랑주 등 과학아카데미 출신들이 교수직을 맡았다. 실력 위주로 선발된 학생들, 최고의 석학 교수진, 국가의 재정 지원이 합쳐지니 우수한 인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혁명 정부는 이들을 도량형, 선거제도, 공중보건 등의 근대화 개혁에 적극 투입했다. 이렇게 국립학교를 통해 과학기술자를 양성하고, 이들을 다시 정부에 고용하는 관료시스템은 현대 프랑스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과학자 입장에서도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상당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1799년 나폴레옹 집권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기술에 관심이 지대했던 나폴레옹은 집권하자마자 라플라스를 내무장관으로, 몽주를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장으로 발탁했다. 이어서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자신의 통치를 지원하는 조직으로 개편했다. 이 작업은 1799년과 1804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방향은 군사화, 즉 군대식 규율과 문화의 이식으로 요약되었다. 교원과 직원들은 군인을 겸했고, 학생들도 중대와 대대로 편제되어 병영생활을 했다. 혁명과 과학의 교의로 출범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군사라는 가치가 더해진 것이다. 이때부터 졸업생 진로에서 군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특히 과학기술 지식이 중요한 포병대와 공병대에서 졸업생들을 대거 흡수했다. 군대로 간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들은 무기 제조와 개량을 주도하는 한편, 정부 소속 공학자로서 운하, 다리, 철도 등의 건설 사업도 관리・감독했다. 이렇게 국가, 과학기술, 군사가 결합된 전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조국, 과학, 영광을 위하여(Pour la Patrie, les Sciences et la Gloire)’라는 교훈에도 잘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은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교복을 입으며, 프랑스대혁명 기념일 열병식의 최선두에 선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현재 전경(위쪽)과 재학생들(아래쪽). 이공계 학교이지만 군사적 목적에 따라 설립되었기 때문에, 재학생들은 여전히 군복과도 같은 교복을 입는다.



     

후발국가의 추격

     

과학을 키운 것은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성공 경험을 목격한 후발국가들도 추격에 나섰다. 이 국가들은 근대화의 속도가 늦은 만큼,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코자 했다. 따라서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명확한 목표에 따라 과학을 전략적으로 지원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20세기 초 독일이 그러했다.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Wilhelm II)는 대외적으로 실리를 우선시한 선대 황제들과 다른 노선을 택했다. 그의 꿈은 독일을 대영제국처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영토를 확장하고 해외 식민지를 건설해야 했다. 그가 내세운 ‘그 무엇보다 독일(Deutschland uber alles)’이라는 슬로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산업 육성과 국방력 강화가 시급한 정책과제가 되었다. 빌헬름 2세는 런던 왕립학회, 파리 과학아카데미, 에콜 폴리테크니크처럼 과학 지식을 생산할 전문가 집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때 아돌프 하르낙(Adolf Harnack)이라는 신학자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과학 연구기관, 특히 물리학과 화학 등 기초연구에 집중하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선진국이 되려면 기초학문이 튼튼해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이 제안에 귀가 번쩍 뜨인 빌헬름 2세는 1911년 연구소 설립에 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렇게 출범한 것이 카이저빌헬름연구협회(Kaiser Wilhelm Gesellschaft)다. 연구소에 황제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눈에 띈다. 그만큼 황제의 강력한 지원 의지를 대변하는 작명이었다. 이렇게 황제를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 마케팅은 특히 기부금 모집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각종 기업과 은행들이 앞다투어 기부금을 내놓았다.


이로써 카이저빌헬름연구협회는 단숨에 거대 조직을 갖추고 뛰어난 과학자를 영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설립 4년 만에 유기화학연구소장 리하르트 빌슈테터(Richard Willstätter)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했다. 인공 질소 비료를 개발해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원한 프리츠 하버(Fritz Haber), 상대성이론을 제창한 아인슈타인도 이곳의 연구소장을 지냈다. 이렇듯 눈부신 성과를 내던 카이저빌헬름연구협회는 나치의 통치 시기에는 암흑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막스플랑크연구협회(Max Planck Gesellschaft)로 개칭했고, 명실상부한 세계적 연구소로 성장하며 떨어졌던 권위를 되찾았다. 현재에도 독일 전역에 80개가 넘는 연구소가 운영 중이다. 2023년 기준 무려 3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 연구소에 ‘노벨상 사관학교’라는 별명은 잘 어울린다.

하버(왼쪽)와 아인슈타인(오른쪽)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천재 과학자들이다. 둘 다 카이저빌헬름연구협회에서 연구했다.


일본도 독일과 비슷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일본은 20세기 초부터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달아 이기며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군사기술과 생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산업혁명도 성숙했다. 즉 일본은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였다. 그 비결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서양이 하는 일은 뭐든지 따라 해 보는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서양에서 보편화된 국가의 과학 지원도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미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 서양에 대거 유학생을 보냈었다. 이렇게 서양의 앞선 연구환경을 체험하고 돌아온 과학자들이 나서서, 국가가 과학에 지원하자는 목소리를 냈다.


다카미네 조키치(高峰讓吉)가 그중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성공한 응용화학자였다. 식물성 성분으로 소화제를 개발했고, 세계 최초로 아드레날린 결정을 추출하여 명성을 날렸다. 아드레날린은 현대의학의 필수 호르몬으로서 급성 알레르기 발작 진정제와 지혈제로 쓰인다. 그러니까 다카미네는 요즘 말로 하면 R&D 벤처사업가쯤 되었다. 이렇게 원천기술 개발로 큰돈을 벌었기에, 그는 기존 기계공업이 물리학‧화학 기반의 과학산업으로 대체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려면 국민과학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거물 사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가 호응했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 제일국립은행, 히토쓰바시대학, 제국호텔 등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에 참여해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사업가의 본능적 촉 덕분인지, 시부사와는 다카미네의 비전이 탁견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주위 정‧재계 인사들을 모아 국민과학연구소 설립 여론을 확산시켰다. 여기에는 총리까지 관여하게 되고, 마침내 1917년 제국의회 의결을 통해 이화학연구소가 출범했다. 초기 자본금 200만 엔은 민간 기부금, 정부 보조금, 왕실 하사금 등을 모아 조성했다. 1913년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다카미네가 오피니언 리더들을 모아 놓고 국민과학연구소 설립에 대해 연설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설립된 서양의 연구소들이 그렇듯, 이화학연구소도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이화학연구소는 특히 기업들에 창의적 기술들을 전수해주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물론 카이저빌헬름연구협회처럼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파시즘에 이용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일본의 핵 개발을 총괄한 곳이 바로 이 연구소였다. 이 때문에 전쟁 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폐쇄되지는 않았고, 이후 일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부활했다. 현재에도 과학강국 일본을 상징하는 연구소로서 세계적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화학연구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2012년 동양국가로서는 최초로 새로운 113번 원소를 발견했다. 일본의 국호를 따서 '니호늄'이라 명명했다.



    

사회 제도로서의 과학

     

과학은 본래 자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호기심을 실험과 논리적 추론으로 해결하려 한 선구자들 덕분에 과학이 학문으로 체계화될 수 있었다. 다만 이때만 해도 과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업으로 삼고 싶어도, 그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대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과학을 만든 선구자는 대부분 취미로 활동하는 아마추어였을 뿐이다. 이들은 그저 호기심을 해결하여 지식을 얻는, 자기만족에 따라 연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과학은 사회적 요구와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곧 근대화의 시대정신이다. 당시 연구되던 모든 학문이 이 거대한 프로젝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과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근대 과학혁명을 거치며 철학에서 벗어나 기술과 결합한 과학은 여러모로 요긴해 보였다. 과학이 생산한 실용적 지식은 근대화의 필수 과업인 부국강병에 지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 점을 깨달은 정치가와 관료들은 과학의 사회적 활용과 파급을 위한 제도들을 설계했다. 과학의 전문화와 함께 등장한 학회, 아카데미, 지원금, 대학, 연구소 등은 그 결과물이었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자, 제도로서의 과학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보는 현대 과학자와 연구기관의 원형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이 해독한 생명의 설계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