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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05. 2023

인간이 해독한 생명의 설계도

DNA와 유전 현상의 규명

과학의 개념이 일상 용어화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빅뱅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물리학 개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거대한 변화나 센세이션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인다. 가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이돌 그룹의 이름인 것은 덤이다. 코페르니쿠스도 그렇다. 근대과학의 문을 연 이 지동설의 주창자는 천문학자보다는 파괴적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주 호명된다. 이 밖에도 관성, 핵, 나노 등도 과학에서 개발되었으나 일상 언어로 더 자주 쓰이고 있다.


DNA(Deoxyribo Nucleic Acid, 디옥시리보핵산) 역시 마찬가지다. 풀네임을 발음하기도 힘든 이 단어는 고향인 생명과학보다 언론에서 더 애용되고 있다. 예컨대 혁신 DNA, 우승 DNA, 도전 DNA, 가을 DNA(야구 한정) 등등. 월드클래스 아이돌 그룹 BTS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아이돌들이 과학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이것들은 모두 ‘원래 타고난’의 함의를 갖는다. 이를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 ‘유전’이다. 유전은 말 그대로 조상의 성격, 체질, 모습 등의 형질이 세대를 이어서 전해진다는 의미다. 인류는 유전 현상을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부모를 닮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누구나 유전이라는 현상이 존재함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유전 개념이 과학적으로 정립되는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DNA는 유전에 관여하는 핵심 물질이다. 인류는 유전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해서 DNA의 비밀을 밝혀내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만큼 여러 학자가 도전해서 어렵게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 발견은 기존의 생명과학 패러다임을 일대 혁신하기에 충분했다. DNA 구조와 기능 규명은 생명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아주 구체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전까지 과학은 주로 물리학(뉴턴역학, 전자기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이 이끌어 왔다. 그러나 DNA를 기점으로 생명과학이 인류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이것은 20세기를 넘어서는, 현재진행형의 주제다. DNA와 유전 현상의 이해는 인간의 건강과 연관된 많은 문제를 해결할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DNA는 일상 용어로도 광범위하게 쓰인다.



     

유전자 개념의 확립

     

유전에 대한 과학적 규명은 1865년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로부터 시작된다. 멘델은 가톨릭 사제였으나 취미 삼아 식물을 연구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완두콩을 키우고 교배시키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조상으로부터 후손에게 전해지는, 고유의 정보 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어떤 법칙에 따라 후대로 이어진다.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배우는 ‘멘델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유전 개념을 과학적으로 처음 확립한 셈이다. 멘델을 유전학의 아버지로 꼽는 이유다.


다만 멘델의 발견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전문 과학자가 아니었을뿐더러, 실험 데이터로 결론을 도출해내는 수학적 방법이 아직 생물학에서는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생물학계를 석권했던 다윈의 『종의 기원』도 수학보다는 박물학에 훨씬 가까웠다. 사실 멘델의 관심도 유전 법칙이 아니라 잡종 교배를 하면 무엇이 만들어지는지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유전에 대한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음을 알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런데 멘델이 죽고 16년이 지난 1900년, 우연히 그 가치가 재발견되었다. 휘호 더프리스(Hugo de Vries), 카를 코렌스(Carl Correns), 에리히 폰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가 거의 동시에 멘델의 법칙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자신이 엄청난 발견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멘델이 같은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 공로를 넘겨야 했다. 이러한 재발견은 유전에 대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가능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부모의 몸에서 나온 액체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자손을 만든다는, 혼합 유전설을 믿었다. 하지만 더프리스와 코렌스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조상의 형질은 독립 단위로서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이 단위 형질 유전 개념은 유전학에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발상이었다. 이를 이어받은 빌헬름 요한슨(Wilhelm Johannsen)이 1909년 유전자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유전자의 물리적 실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이 때문에 아예 유전자 개념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한 것이 토머스 모건(Thomas Morgan)이었다. 모건은 본래 멘델 이론의 반대진영에 속했었다. 그러나 1913년 초파리 눈의 돌연변이가 멘델의 법칙을 따라 유전됨을 확인하고, 거꾸로 멘델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모건은 한 발 더 나가 초파리 돌연변이와 염색체의 연관성도 밝혔다. 유전정보가 염색체 속에 있음을 밝힌 업적으로 모건은 193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유전학 분야에 최초로 수여된 노벨상이었다.

다윈과 멘델은 생명의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은 과학자들이다.

이제 염색체 안에 있는 유전자의 실체를 밝힐 차례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염색체 안으로 들어가서 유전자를 확인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염색체는 단백질과 핵산으로 이루어졌음이 알려졌다. 그리고 프레데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가 일대 전환점이 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세균의 형질전환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유전물질에 열을 가해도 그 특성이 유지된다는 점에 착안했다. 즉 유전자란 신비한 그 무엇이 아닌 그저 화학물질이라는 결론이다. 이 주장은 다른 학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허먼 멀러(Hermann Muller)가 X선으로 돌연변이를 인공 생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X선이라는 전자기파를 유전자에 쬐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이것이 화학적으로 구성된 물질임을 시사했다.

 

마침내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Oswald Avery)가 핵산 중에서도 DNA가 유전물질임을 확인했다. 그리피스의 실험을 더욱 정교하게 수행해서 얻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 대발견은 쉽사리 수용되지 못했다. 기존 학자들은 유전자의 유력 후보로 단백질을 꼽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전이라는 심오한 현상을 주도하려면 단백질처럼 복잡한 구조를 갖는 물질이 더 적합해 보였다. 반면 DNA는 학자들이 ‘멍청한 분자’라고 무시할 정도로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은 그보다 7년 뒤인 1951년에 완전히 인정받게 된다. 다만 에이버리의 통찰이 그대로 묻혀 버리지는 않았다. 에이버리에 감명받은 에르빈 샤가프(Erwin Chargaff)가 핵산 연구에 뛰어들어 중요한 법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의 4종류 염기로 구분된다. 샤가프에 따르면 이중 피리미딘(아데닌, 구아닌)과 퓨린(티아민, 사이토신)은 1:1의 비율을 이룬다. 그리고 아데닌과 티아민, 구아닌과 사이토신의 비도 역시 1:1이다. 이것이 샤가프의 법칙이다. 다만 샤가프는 멘델이 그랬듯 자신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샤가프의 법칙은 후일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가장 결정적인 힌트가 된다.



     

전인미답을 향한 경쟁 

    

이제 DNA에 담긴 유전의 비밀을 풀 실마리들은 갖춰진 셈이었다. 남은 것은, 누가 마지막 퍼즐을 맞춰 전인미답에 도달할 것인지였다. 많은 학자가 경쟁했으나 최종 승자는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이라는 25세의 박사후연구원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라는 37세의 대학원생이 그들이다. 1953년 4월 25일, 학술 저널 《네이처(Nature)》에 실린 이들의 논문 ‘핵산의 분자적 구조 :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는 멘델 이후 반세기 동안 추적해왔던 유전자의 비밀을 생생히 밝히고 있었다. 핵심은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것이다. 사실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발견치고 논문의 길이는 매우 짧았다. 참고문헌 목록을 빼면 달랑 1페이지다. 다만 거기에는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인, DNA의 이중나선 모양이 들어가 있다. 오늘날 생명과학을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한, 바로 그 꽈배기 모양이다.


서로 딱 들어맞는 두 개의 나선은 유전물질로서 DNA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유전물질의 가장 기본적 기능은 복제다. DNA는 한쪽 나선을 떼어 그대로 복제함으로써 후손에게 유전정보를 전해주기 쉽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즉 DNA가 모여 유전자를 만들고, 이것이 단백질을 생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생성된 단백질은 세포와 조직의 구성, 에너지 흡수와 사용, 호르몬 합성 등 인체의 기능 전반을 관장한다. DNA를 ‘생명의 설계도’에 비유하는 이유다. 이전까지 생명과학의 가장 큰 성취였던 진화론은 생명체를 그저 오랫동안 관찰만 하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 안으로 들어가, 분자 수준에서 생명 현상을 정밀하게 이해하는 과학으로 발전하게 됐다.

왓슨과 크릭이 1953년 네이처에 낸 논문은, 1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을 담고 있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축구로 치면 레스터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같은 것이었다. 이미 쟁쟁한 석학들이 DNA 구조 규명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은 이들과 비교하면 애송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극적인 역전에 성공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왓슨과 크릭의 역량이 뛰어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과학의 위대한 발견에 흔히 동반되는, 우연과 행운의 도움을 받았음도 분명하다.


경쟁의 선두에는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 있었다. 그는 이미 1951년에 단백질의 알파나선 구조를 규명한 당대의 석학이었다. 폴링은 여세를 몰아 1953년 1월에 DNA가 삼중나선 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삼중나선 모델은 화학적으로 불안정한 데다, 염기가 어떻게 정보를 얻는지도 알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폴링의 명성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왓슨과 크릭도 폴링의 논문 발표 소식에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그 주장의 어처구니없음을 알고 축배를 들었다고 술회했다. 두 달 만에 폐기된, 이 실수로 인해 폴링은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는 논문에 중대한 결함이 세 가지나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도 유력한 발견 후보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X선 사진 촬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세포 속에 존재하는 DNA는 당연히 눈으로 볼 수 없다. 다만 강한 에너지의 전자기파인 X선을 쏘면 그 결정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은 이걸로 DNA 내부 모습의 실험적 증거를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둘은 과학사에서 역대급으로 꼽힐 만큼 사이가 나빴고, 이 불화가 뜻하지 않게 왓슨과 크릭에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왓슨과 크릭은 실험보다는 논리적 추론과 모형 제작에 집중했다. 1950년대가 되면 DNA가 나선 모양일 거라는 추측은 보편화되었다. 이미 단백질도 나선형임이 증명되었고. 생체 고분자의 구조는 그렇게 상정하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결정타가 된 것이 프랭클린의 X선 사진이었다. 프랭클린이 51번으로 명명한 이 사진에는 DNA의 모습이 역사상 가장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X선 연구자로서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기도 했다. 다만 프랭클린은 윌킨스와의 불화 끝에 이직했고, 그녀의 자료는 윌킨스가 이어받았다. 그런데 윌킨스는 51번 사진을 비롯한 프랭클린의 연구성과를 원저자 동의 없이 왓슨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DNA 구조 규명 경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된다. 왓슨이 프랭클린이 남긴 자료들에서 그때까지의 난점들에 대한 중대한 힌트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중나선 구조를 확신한 왓슨과 크릭은 폴링의 전매특허였던 모형 제작 기법을 적용하여, DNA를 구성하는 염기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해 보았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완벽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DNA 구조 규명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경쟁은 워낙 극적이어서 1980년대 유럽에서 <The Race for the Double Helix>라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직관과 융합

     

1962년 왓슨, 크릭, 윌킨스는 DNA 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다만 X선 사진으로 실험적 근거를 제시한 프랭클린은 수상하지 못했다.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하는데, 프랭클린은 1958년 이미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DNA 구조 규명에서 프랭클린의 기여도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왓슨과 크릭이 그녀의 X선 연구에서 결정적 도움을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53년 《네이처》 논문의 참고문헌 목록에도 프랭클린의 이름은 없다.

 

이는 1968년 왓슨이 DNA 구조 규명 과정을 회고하며 쓴 책 『이중나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왓슨은 여기서 프랭클린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면서도, 연구자로서 그녀를 평가절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연구윤리 문제로 비화하며 큰 비판을 받게 된다. 왓슨이 프랭클린의 성과를 도둑질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당시는 프랭클린 같은 여성 과학자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프랭클린은 여성이라서 업적을 빼앗긴 비운의 과학자,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왓슨은 후일 프랭클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책의 후기에 추가했다.


왓슨과 크릭이 그저 우연히 프랭클린의 사진을 본 것만으로 DNA 구조를 규명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게 그 사진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진작에 윌킨스나 프랭클린이 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친, 그들만의 뛰어난 역량이 있었다.

 

첫째로 직관이다. 왓슨과 크릭은 주어진 정보들을 조합하여 창의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직관력이 뛰어났다. 51번 사진을 보자마자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샤가프 본인도 의미를 몰랐던 샤가프의 법칙을 응용할 수 있었던 것도, 네 종류 염기의 복잡한 결합 구조를 완벽히 맞춘 것도,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둘째는 융합이다. DNA 구조 규명은 기존 유전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과업이었다. 예컨대 화학물질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X선 결정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적 방법론도 갖춰야 했다. 이 점에서 왓슨과 크릭은 환상의 콤비였다. 원래 동물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왓슨은 DNA 연구를 하고자 생화학과 물리학도 익혔다. 크릭은 비슷한 시기 많은 학자가 그랬듯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환한 경우였다. 양자역학을 확립한 보어와 슈뢰딩거는 생명 현상의 물리학적 이해를 강조하여 이러한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본적인 요소에 근거하여 거시적 현상을 해석하는, 물리학의 환원주의가 생명과학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DNA 구조 규명을 계기로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낸다. 가장 근본적인 유전물질을 규명함으로써 생명 현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분자생물학과 물리학은 유사한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했다.

프랭클린(왼쪽)이 찍은 51번 사진(오른쪽)은 DNA 구조 규명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지만, 그녀의 이러한 기여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인간, 진화의 설계자?

     

DNA 구조를 밝힘으로써 생명과학은 대도약했다.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생명 현상의 많은 비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60~70년대에는 유전자 복제의 과정과 거기에 작용하는 효소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었다. 이쯤 되자 인간이 직접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제어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가능성도 대두되었다. 설계도와 자재가 있으면 아무리 크고 복잡한 건물도 리모델링하거나 새로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배경에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발달했다. 한 생명체의 DNA를 잘라서 다른 생명체로 붙일 수 있는 제한효소가 대표적이다. 이로써 생명과학 기술로 생물 종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1980년대에는 핵산의 염기서열을 결정하는 DNA 시퀀싱과, 원하는 유전정보 물질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키는 중합효소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 기술들은 특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미리 찾아냄으로써, 유전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신기원을 열었다. 현대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한 맞춤의학은 바로 이러한 기술적 토대에서 가능해진다. 기존 의학이 환자를 일반화해서 진단했다면, 맞춤의학은 개인마다 다른 기준을 설정한다. 그래서 병을 훨씬 구체적인 수준에서 정확히 진단할 수 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환자의 DNA 염기서열을 밝히고, 이를 레퍼런스 유전체의 염기서열과 비교하여,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 변이를 확인하는 원리다. 1986년부터 2003년까지 국제공동연구로 진행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바로 이러한 표준 레퍼런스의 구축이라는 야심 찬 목표와 맞닿아 있었다.


유전자를 제어하는 기술의 최신 버전은 유전자가위다. 유전자가위는 살아있는 세포의 DNA를 가위처럼 잘라 염기서열을 교정한다. 특히 세균에서 유래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가장 정교한 유전자 교정 도구로서 2020년 노벨화학상까지 받았다. 유전자가위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과 미생물에 사용할 수 있어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니까 이걸 이용하면 전염병에 강한 가축, 병충해를 쉽게 이겨내는 농작물을 만들 수 있다. 암 치료에도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다. 암이란 돌연변이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병이기 때문이다. 비단 질병뿐만 아니라 미용에도 쓸 수 있다. 예컨대 탈모의 원인 유전자가 발견되면, 유전자가위를 통한 교정으로 대머리가 안 되게 할 수도 있다.


이렇듯 DNA에서 시작된 생명과학의 급진전은 짧은 시간에 인류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인간은 생명 현상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조작하고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것은 문명사적 의의를 갖는 변화이기도 하다. 본래 인간은 진화의 산물로 이 세상에 등장했고,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그 메커니즘을 따르는 객체로 존재했다. 그런데 유전자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면서 진화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유전자 기술은 인간에게 이제껏 경험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미래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연 진화의 설계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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