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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25. 2023

우연히 꿰뚫어 본 인체의 내부

X선과 영상의학의 태동

과학은 이성과 논리의 학문이다. 그 세계는 연역과 귀납의 연결 고리들로 틈 없이 짜여 있다. 이렇게 과학을 구성하는 논리의 정교함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20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프랭크 윌첵(Frank Wilczek)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연의 복잡한 세계가 철저한 수학 규칙으로 환원되는 것을 아름답다고 예찬했다. 윌첵에 의하면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과학적 영감의 원천이다. 그러니 한때 과학자들이 수학으로 세상만사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자들이 꿈꿨던 궁극의 목표가 바로 이 보편수학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보면, 꼭 논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음을 알게 된다. 과학의 발견이 연구자가 설계한 계획과 논리대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의외로 별로 없다. 오히려 우연과 행운이 자주 개입된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은 과학의 이러한 특성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개념화했다. 운 좋은, 또는 뜻밖의 발견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게 과학은 어차피 다 우연의 산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세렌디피티는 준비된 상태,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우연이다. 즉 어떤 연구에 몰입한 상태에서 갑자기 차원이 다른 발견으로 나아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895년 발견된 X선은 세렌디피티의 전형적 예다. 발견 과정이 그만큼 뜬금없었다. 발견자인 빌헬름 뢴트겐(Wilhelm Röntgen)도 유명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X선이 등장하면서 인류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당장 X선 없는 외과 치료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또한 X선으로 물질의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봄으로써 자연에 대한 이해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1901년부터 시상된 노벨물리학상의 첫 번째 수상 성과도 바로 이 X선이었다. X선은 발견의 계기가 우연이었다고 해서 그 결과도 사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운명을 바꾼 실험

     

19세기 과학의 위대한 진보를 이끈 전자기학은 X선 발견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과학자들의 관심 중 하나는 진공 속에서 전류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보는 것이었다. 1869년 요한 히토르프(Johann Hittorf)는 이를 관찰하다가 음극에서 양극으로 어떤 광선이 흐른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 오이겐 골드슈타인(Eugen Goldstein)이 음극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음극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유리벽이나 형광물질에 닿으면 빛을 냈다. 다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에 많은 이들이 음극선의 정체를 밝히는 데 도전했다. 마침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가 진공관(일명 크룩스관)을 발명하면서 좀 더 편리하게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뢴트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의 학장으로서 막 1년의 임기를 끝낸 참이었다. 평교수로 돌아간 뢴트겐은 원래 해오던 음극선 실험을 재개했다. 그리고 1895년 11월 8일 인류의 운명을 뒤바꾸는 실험을 했다. 이날의 목표는 유리관을 투과한 음극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음극선이 내는 형광빛은 유리관을 투과하며 생긴다는 가설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음극선은 유리관을 투과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량의 음극선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뢴트겐의 생각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필리프 레나르트(Philipp Lenard)가 만든, 음극선이 투과할 수 있는 얇은 알루미늄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금속을 투과하는데 유리관도 투과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다만 그렇게 유리관을 투과한 음극선은 아주 약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뢴트겐은 빛을 차단하고자 크룩스관을 검은 마분지로 단단히 감쌌다. 실내등을 모두 꺼서 실험실도 어둡게 만들었다. 준비가 다 되자 크룩스관에 전류를 흐르게 했다. 마분지로 싸인 크룩스관에서는 어떤 빛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맞은편의 책상 위 백금시안화바륨 용지에 희미한 빛이 생겼다. 이 용지는 유리관을 투과한 음극선을 확인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아니, 빛이 왜 거기서 나와…? 당황한 뢴트겐은 용지를 더 멀리 떼어놓아도 보고, 용지와 크룩스관 사이에 두꺼운 책을 놓아보기도 했다. 결과는 같았다. 이게 음극선일 리는 없었다. 음극선은 공기 중에서도 고작 3㎝ 정도만 날아간다. 이것이 몇 미터나 떨어진 책상까지, 그것도 두꺼운 책을 뚫고 지나갔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백금시안화바륨 용지와 반응한 것은 강한 투과력을 가진 새로운 광선(ray)이 분명했다. 일단 발견은 했으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미지수를 뜻하는 ‘X’라고 명명했다.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만화(위)와 실제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실험실(아래).


X선의 투과력은 실로 대단했다. 나무, 고무, 섬유쯤은 아무렇지 않게 뚫고 지나갔다. 두꺼운 납을 갖다 대어야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뢴트겐은 여기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보통의 광선이 그러하듯, X선도 건판에 감광시켜 사진으로 찍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 기묘한 광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무렵 사진은 유리, 셀룰로이드 등의 건판에 감광물질을 바르고 빛을 쪼여서 찍었다. 빛의 세기에 따라 감광 반응 정도가 달라져 흑백 명암이 나타나는 원리다. 뢴트겐은 X선이 투과하는 물체의 밀도에 따라 흑백 명암이 다르게 찍힐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에는 뢴트겐의 아내가 모델(?)로 직접 나섰다. 여전히 정체불명의 광선을 확신할 수 없었던 뢴트겐에게 아내 말고는 적당한 피실험자가 없었을 것이다. 12월 22일 뢴트겐은 크룩스관과 건판 사이에 아내의 손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현상해 보니 예상대로였다. 사진 속에 뼈는 뚜렷하게, 근육은 희미하게 나타나 있었다. 심지어 아내의 반지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X선의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촬영이었다.



    

영상의료기술의 혁명

    

뢴트겐은 이렇게 완벽한 증거를 확보한 뒤에야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학자가 음극선을 연구하고 있어서 발표를 서둘러야 했다. 이 논문은 12월 28일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물리·의학학회지에 게재되었다. 논문을 접수한 편집진도 그 중요성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일주일이라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에 게재를 결정했다.


10페이지에 불과한 이 논문은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1월 4일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국에 알려졌고, 1월 9일에는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위대한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다. 1월 23일에는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물리·의학학회가 뢴트겐의 특별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이 자리에서 80세의 해부학자 알베르트 폰 쾰리커(Albert von Kölliker)가 자청해 X선으로 손 사진을 찍었다. 참석자들은 선명하게 찍힌 손뼈 사진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쾰리커는 45년간 학회 회원으로 있었지만, 이보다 중대한 발표를 본 적은 없다며 뢴트겐의 업적을 치켜세웠다.


X선을 가장 잘 써먹은 것은 역시 의사들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의사들의 진단은 오직 감각에만 의존했다. 즉 시진, 청진, 타진, 촉진 말고는 병세를 관찰할 방법이 없었다.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몸속을 보는 것이 모든 의학자의 숙원이었다. 이전까지는 마취 후 환자의 몸을 열어보곤 했다. 환자에게는 고통이 따르는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직접 들여다볼 방법이 나왔으니, 의사들이 환호한 것은 당연했다. X선을 쓰면 골절의 진단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의사들은 몸에 꽂힌 유리 파편과 탄환을 찾아냈고, 총격으로 손상된 머리도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임상 정보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X선 발견 후 1년간 1,000편이 넘는 논문과 50권이 넘는 단행본이 쏟아졌다. 대부분은 의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외과수술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901년 뢴트겐은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자연의 비밀을 밝힌 동시에, 인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인, 노벨상 제정 취지에 찰떡처럼 어울리는 성과였다.

역사상 최초(왼쪽, 뢴트겐 아내의 손)와 두 번째(오른쪽, 쾰리커의 손) X선 촬영 사진

뒤늦게 확인된 사실이지만, X선은 전자기파의 한 종류로서 자외선과 감마선의 중간 정도 파장을 갖는다. 그래서 에너지가 상당히 크고 투과력이 좋다. 직진성도 강해서 자석에 의해 휘지 않는다. 다만 가시광선과 비교하면 파장이 수천 배는 짧으니, 눈에 보이지 않고 인지하기도 어렵다. 오랜 세월 그 존재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X선 등장 이후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인체를 과학적으로 분석 및 진단하는 영상의학이 새롭게 태동했다. 초기의 X선 진단기법은 주로 골격계와 흉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X선이 고전압으로 개량되어 인체 깊은 곳에 도달하고, 바륨 조영제가 도입되면서 소화기계 진단도 가능해졌다. 이에 위장, 비뇨기계, 혈관, 뇌실 등이 영상의학의 분석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다만 한계도 있었다. 평면 촬영인 X선으로는 대상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입체적인 이해가 불가능했다. 이는 진단 가능한 병의 종류를 크게 제한시켰다.


초기 X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970년대 개발된 것이 컴퓨터단층촬영(Computed Tomography, CT)다. CT는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수십만 개의 X선 데이터를 합성하여 입체화된 영상을 구현한다. 즉 2차원에 머물렀던 X선의 한계를 말 그대로 한 차원 더 뛰어넘은 것이다. 이걸 개발한 이들은 뢴트겐처럼 의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미국 물리학자 앨런 코맥(Allan Cormack)은 조직별로 방사선의 흡수량 차이를 계산하면, 이걸 역이용해 영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영상화에 필요한 수식을 만들었으나, 당시 컴퓨터가 계산하기에는 벅찼다. 10여 년 뒤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면서 고드프리 하운스필드(Godfrey Hounsfield)라는 영국의 전기공학자가 코맥의 수식을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CT의 등장으로 장기질환과 뇌출혈 등에 대한 정밀검사가 가능해졌다. 코맥과 하운스필드도 이 공로로 197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뒤이어 자기장 속 입자에 전자기파를 쏘아 원자핵을 공명시켜 유기물 구조를 분석하는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 MRI) 기법도 등장했다. X선과 달리 자기장을 이용하는 이 신기술도 20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X선, CT, MRI로 이어지는 3개의 노벨상에서 영상의학이 인류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준비된 과학자에게 찾아온 행운

     

뢴트겐은 집념의 과학자였다. 그는 평생 48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50세에 갑자기 X선이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는 일견 로또에 당첨된 행운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과정이 그저 우연으로만 얻어걸렸다고 할 수는 없다. X선을 발견할 기회는 음극선을 연구했던 다른 학자들에게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뢴트겐 이전에도 많은 사람이 X선의 존재를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일례로 크룩스는 새로 산 사진 건판이 (X선 때문에) 못쓰게 되는 경험을 종종 했는데, 원인을 찾기보다는 제조업체에 항의만 했다. 레나르트도 뢴트겐처럼 크룩스관 근처에서 빛이 나는 것을 목격했지만, 실험 장치 고장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러나 뢴트겐은 이상 현상에 의문을 품고 끈질기게 추적해 새로운 발견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도 실험으로 검증하는 치밀함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과학자로서 엄격한 태도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X선을 발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심지어 뢴트겐은 발견 뒤에도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실험을 하면서도 뭔가 착각하지 않았는지,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닌지 계속 확인했다. 아내의 손을 직접 찍어본 뒤에야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며 안도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정신 상태보다 객관적 증거를 더 믿는 철저한 과학자였다.

과학의 역사에서 우연한 발견은 의외로 많다. X선만큼이나 위대한 성과인 페니실린도 비슷하다.

뢴트겐은 겸손한 인격자였다. 그는 X선이 우연한 발견이었고, 본인은 이미 50세가 넘었기에 더는 창의적 업적을 내기 힘듦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거나 대가연하지 않았다. X선에 대한 뢴트겐의 강연은 발견 직후 열린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물리·의학학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제국의회를 포함한 여러 기관이 강연을 요청했지만 죄다 거절했다. 바이에른 왕국이 주는 훈장은 받았지만, 이름에 귀족 칭호 ‘폰’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사양했다. 노벨물리학상 상금도 모두 학교에 기부했다. 다만 X선을 발견한 책임감 때문에 1897년까지 두 편의 논문을 더 썼다. 그러나 논문들에서 이 신묘한 광선의 의료적 활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X선의 성질과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 건조하게 서술할 뿐이었다. 비유컨대 스마트폰을 개발했으면서 매뉴얼에는 통화와 문자 메시지 기능만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뢴트겐은 강직한 지식인이었다. 누가 봐도 X선의 특허는 떼돈을 벌 기회였다. 독창적 아이디어를 특허로 독점해 돈을 버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었다. 예컨대 영국은 1623년 일찌감치 확립한 특허법 덕분에 산업혁명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법 때문에 기술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이 부를 축적하며 산업도 더욱 발달하는 선순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뢴트겐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X선의 특허 제안을 끝까지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랬다. “X선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원래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자산이어야 한다.” 카피레프트라는 용어도 없던 시절에 그 철학을 앞장서 실천한 것이다. 만약 X선의 사용권이 독점화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거대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기업들만 주로 썼을 것이다. 그러면 X선은 과학의 발전보다는 철저히 돈 되는 비즈니스 수단으로만 국한됐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우연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연을 축적된 필연이라고도 한다. 엄청난 노력파이면서 인격자였던 뢴트겐은 X선이라는 놀라운 우연을 얻기에 충분한 과학자였다. 그가 보여준 학문적 태도는 과학과 무관한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연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자연은 우리에게 종종 아주 평범한 관찰로부터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평소에 현명함과 통찰력으로 경험을 다진 사람만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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