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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12. 2023

수술의 고통을 없앤 마법

마취제와 외과의 현대화

1826년 영국의 에든버러대학교 의과대학. 한 소년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대에 꽁꽁 묶인 소년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날카로운 수술 도구들이 작은 몸을 쪼개고 잘랐다. 소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기절했다. 옆에서 수술을 참관하던 의대생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결국 자퇴했고, 두 번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찰스 다윈이다. 의사 집안의 아들이었던 다윈은 이후 신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신학보다는 박물학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불멸의 명저 『종의 기원』을 남겼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래도 다윈이 의대생일 때 마취제가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그럼 『종의 기원』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윈이 목격한 수술 장면은 마취제가 없던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의 가장 큰 덕목은 스피드였다. 최대한 빠르게 수술을 끝내야 명의로 대접받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로버트 리스턴(Robert Liston)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리스턴은 단 30초 만에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이런 신기에 가까운 수술법 때문에 그에게는 늘 예약 환자가 넘쳐났다. 특히 그는 빠른 수술을 위해 엄청나게 크고 날카로운 칼(Liston Knife)을 직접 제작해서 썼는데, 하필이면 후일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도 쓰면서 악명을 떨쳤다.


물론 빠른 수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환자에게 술을 먹이거나, 경동맥을 압박해서 실신시키거나, 머리를 냅다 후려쳐 기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말 기절초풍할 방법들이었다. 수술 직전이나 하는 중에 쇼크사하는 환자들도 여럿 나왔다. 수술을 받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였던 셈이다.

19세기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즈버그에서 리스턴 칼을 사용해 절단 수술을 하는 모습.



     

마약에서 마취제로

     

인류 역사에서 마취 비슷한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중국의 화타다. 삼국지의 애독자라면 반가워할 이름이다. 관우가 바둑을 두면서 팔 수술을 받았다는, 바로 그 전설의 명의다. 화타가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자세한 제조법은 전해지지 않아, 이 또한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19세기 초 일본에는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靑洲)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개항 이전에 네덜란드 의학을 받아들여 통선산이라는 마취제를 개발했다. 이걸로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와 유방종양 제거 수술을 했다고 한다. 통선산 제조법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걸 그대로 따라 해보니 마취 효과가 있었다는 의대 교수의 증언도 있다. 이 밖에도 아편, 대마, 맨드레이크 같은 약재들이 쓰이기도 했다. 사실 이름만 약재이지 마약이나 마찬가지다. 마약에 취해서라도 수술의 고통을 줄이고자 했던 눈물겨운 노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과학적 효과가 분명한 마취제는 역시 과학혁명 이후에나 가능했다. 산소의 발견자로 유명한 프리스틀리는 1772년 아산화질소 가스를 발견했다. 이 물질에는 사람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드는 성분이 있어서 웃음 가스(laughing gas)라고도 불렸다. 이런 특징에 주목해 수술용으로 쓰자고 제안한 인물이 패러데이의 스승 데이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술보다는 파티에서 환각제로 주로 쓰였다. 1844년 미국의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Horace Wells)는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아산화질소를 마신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는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이걸 마취제로 쓰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다음날 바로 자신의 사랑니를 뽑는 데 써보니, 정말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흥분한 웰스는 동료 의사들을 불러모아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연은 실패했다. 사랑니를 뽑힌 환자는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후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하자 웰스는 치과의사를 그만두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2년 뒤 미국 치과의사협회는 그가 최초의 마취제 발견자임을 공인했다.


웰스와 함께 마취제를 연구했던 윌리엄 모튼(William Morton)은 스승의 실패를 교훈 삼아 다른 대안을 찾았다. 그 결과물이 에테르(ether)였다. 하버드대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찰스 잭슨(Charles Jackson)은 모튼에게 에테르의 효능을 알려주면서 이를 직접 시험해보자고 권유했다. 마침내 1846년 10월,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에테르를 마취에 사용한 수술이 시행되었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은 하버드 메디컬스쿨의 부속병원으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의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후일 세계적 명문 병원이 되는 이곳에서 사상 처음으로 마취 수술이 이루어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모튼은 솜에 묻힌 에테르를 환자에게 흡입시켜 의식을 잃게 했다. 이후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외과 과장인 존 워런(John Warren)이 목의 종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 보스턴 언론은 수술 결과를 대서특필했다. 수술에 참여한 의사들은 사례들을 정리해서 의학 저널에 보고했다. 이로써 에테르는 우수한 마취제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수술은 물론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에테르 발견자들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했다. 대대적인 특허권 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원래 모튼은 에테르의 특허를 단독으로 등록했다. 하지만 그에게 에테르의 중요한 정보를 주고 공개 시연을 주선한 것은 잭슨이었다. 잭슨이 반발하자 모튼은 마지못해 공동으로 등록했지만, 둘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잭슨은 에테르의 발견 공로는 100% 자기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 크로포드 롱(Crawford Long)이라는 조지아의 의사도 끼어들었다. 롱은 모튼보다 4년이나 빠른 1842년 에테르를 두 차례의 수술에 사용했으나, 이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술 사례를 논문으로 제출했다. 이로써 특허권 분쟁의 당사자는 세 명으로 늘어났다. 의회는 5년에 걸쳐 이 문제를 심의했으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방황하던 모튼은 센트럴파크의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고, 잭슨은 7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다가 거기서 숨을 거두었다. 에테르의 발명자에 대한 영예는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남았다.


다만 1926년 국회의사당에 롱의 대리석상이 세워져서, 국가적으로는 롱을 최초의 마취제 개발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최초의 공개 수술이 있었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건물을 1965년 에테르 돔(Ether Dome)이라는 이름의 국가유적으로 지정했다. 어찌 됐든 웰스, 롱, 모튼이 다양한 방법으로 최초의 마취제 개발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미국 의회에 있는 롱의 대리석상(위쪽)과 보스턴에 국가유적으로 남아 있는 에테르 돔(아래쪽). 마취제의 발견은 이렇게 국가적으로 기념할 만큼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클로로포름이 일으킨 논란

     

이렇게 센세이션을 일으킨 에테르지만, 단점도 있었다. 발화점이 낮아서 작은 열에도 쉽게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화성 때문에 화재 사고가 여러 번 났다. 냄새도 아주 역했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의 제임스 심슨(James Simpson)이 새로운 마취제 개발에 나섰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그는 에테르를 이용해 분만을 시도해봤으나,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에테르가 기관지와 위장에 심각한 자극을 가했기 때문이다. 또 특유의 역한 냄새 때문에 산모들이 불쾌해했다. 그래서 더 나은 마취제를 찾고자 다양한 화학물질들을 시험해보았다. 이때 사용한 방법이 아주 단순무식했는데, 동료들과 함께 여러 가스를 들이마시면서 어떤 것이 통증 완화에 효과가 좋은지 골라내는 식이었다.


클로로포름(chloroform)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47년 발견되었다. 의사들이 몸으로 직접 실험해본 결과물이라 그런지 효능은 확실했다. 에테르보다 마취가 잘 되었고, 역한 냄새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안전했다. 심슨은 즉각 출산에 클로로포름을 사용했고, 이것의 유용성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에든버러에서만 2년 동안 4만 명의 환자가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했다.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Maurice Leblanc)이 추리소설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 시리즈에서 상대를 납치할 때 쓰는 약으로 묘사할 정도였다. 출산의 고통에 시달리던 산모들은 클로로포름의 등장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대표적이었다. 대략 이런 주장이었다. “인간의 통증도 곧 하나님의 뜻이다. 이걸 인위적으로 없애는 일은 신의 섭리에 어긋난다.” 특히 여성의 산고는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지은 원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므로 더욱 없애면 안 된다고 보았다.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성의 근원인 출산의 고통을 없애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지금 보면 황당하지만, 19세기에는 이런 생각들이 진지한 사회적 담론이 되었었다. 1849년 심슨이 의학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자. 당시의 황당한 세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른 의과대학에서는 출산하는 여인에게 마취제를 주는 나의 행동의 신의 섭리와 질서에 어긋나며, 따라서 이단적이고 괘씸한 일이라고 비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대 여론을 불식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은 1853년 레오폴드(Leopold) 왕자와 1857년 베아트리스(Beatrice) 공주를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 분만법으로 출산했다. 이것으로 논란은 종결되었다. 물론 여왕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행동을 했을 리는 없었다. 클로로포름과 무통 분만 논란이 국론분열의 양상을 보이자, 여왕이 의도적으로 한쪽을 편들어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종교보다는 과학, 남성보다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었다. 여왕의 출산을 계기로 심슨은 엄청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고, 의학 교과서에 이름을 올렸으며, 여왕의 주치의로도 선발되었다. 1866년에는 귀족 작위(준남작)도 받았다. 여왕이 하사한 문장에는 “정복된 고통(Victo Dolore)”이라는 간지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1870년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 3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한 이 의사의 마지막 길에 경의를 표했다.

초창기 마취제인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위쪽), 그리고 이 약품들을 환자에 쓰는 방법(아래쪽). 마취제는 의학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소하지만 위대한 발명품

     

클로로포름도 선배 마취제들의 운명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1937년, 간 손상과 심실세동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이 확인되면서 더 이상 마취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마취제들도 많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수면마취의 시대가 열린다. 대표적으로 티오펜탈 나트륨은 초단기 마취제로서 특히 전신마취의 도입 단계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정맥주사 뒤 30~45초 만에 뇌에 도달하여 무의식 상태를 만들고, 10~15분 정도면 약물의 효과가 끝나는, 짧으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자랑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미다졸람과 프로포폴이 등장한다. 일반인에게도 유명한, 수면 내시경 검사에 쓰이는 마취제의 양대산맥이다. 그러니까 불과 1백여 년 사이 일이다. 목숨을 걸고 수술해야 하는 시대에서 수면 상태에서 몸의 리스크를 사전 예방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


마취제는 일견 사소해 보이나, 의학은 물론 사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백신, 항생제와 함께 의학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마취제를 사용하면서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대한 부담과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스턴의 다리 절단 30초 세계 기록(무슨 올림픽도 아니고)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는 복잡한 수술을 얼마나 정밀하게 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가 마취제를 계기로 현대화한 것이다. 인체 깊숙이 위치한 복강, 흉강 등은 기존 의사들의 손이 닿지 않던 곳이었다. 마취제를 통해 비로소 이곳들이 의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뇌, 장기 이식 등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고난도 수술도 가능해졌다. 마취가 가져온 효과는 수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면 내시경의 보편화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몸 안의 위협 요인을 미리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 동안 대장암 사망자 수가 꾸준히 감소해온 것은 내시경 검사의 확대와 연관이 깊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수필집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이라는 말을 썼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을 볼 때, 바쁜 일상에서도 작은 즐거움을 느낀다는 통찰이다. 오래전 일본인 작가가 농담처럼 사용한 조어가 어쩌다 수십 년 만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의학에서 소확행에 가장 가까운 발견은 마취제라는 것. 마취제는 겉보기에는 별 것 아닌 약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생명의 많은 부분이 확실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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