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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Feb 03. 2024

소리 없이 강한 지식,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6)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학습만화가 있다. 1980~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전설의 레전드인 작품이다. 수많은 꼬꼬마가 이 책을 읽고 유럽이라는 신세계에 입문했었다. 나도 이 책에서 시작하여 결국 수능 때 세계사까지 선택(전교에서 나 혼자였다)했다. 아마 고3 담임의 협박에 가까운 만류가 아니었다면, 대학도 사학과로 가서 서양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 책만큼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상세하게 전해주는 자료가 없었다. 독일에서 유학한 저자 이원복 교수가 전공인 미술을 넘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췄던 덕분이다.

     

이 책으로 얻은 세계사 지식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영국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의 연합국가라는 것.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병합은 1707년으로,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책은 특히 두 나라의 정체성이 상당히 다름을 강조한다. 예컨대 럭비나 축구와 같은 영국 전통의 스포츠는 따로 출전하며, 스코틀랜드인에게 잉글랜드인이라고 하면 큰 실례라는 등의 깨알 정보가 그렇다. 어릴 때는 이런 설명을 읽으면서, “스코틀랜드? 별 존재감도 없는 나라가 자존심은 세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결코 가볍게 볼 나라가 아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18세기 계몽주의의 한 축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통 계몽주의라고 하면 프랑스를 떠올린다. 실제로 프랑스에 계몽주의자들이 많기도 했지만, 그들은 혁명이라는 요란한 방식으로 그것을 관철시켰기에 더 강렬했던 면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 전통은 프랑스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혁명으로 전면화되지는 않았으나, 근대정신의 기저에 단단한 초석을 놓았다. 그 이론적 유산은 몇백 년이 지난 우리의 사유체계에도 깊숙이 존재하고 있다.

그 옛날 『먼나라 이웃나라』가 알려준 소중한 지식. 영국은 4개 왕국이 연합해 만들어졌으며, 국기인 유니언 잭에 그 상징이 반영되어 있다.



     

경험주의의 완성

     

에든버러와 글래스고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지적 근거지였다. 흔히 영국을 대표하는 명문대학으로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꼽힌다. 그러나 에든버러대학교와 글래스고대학교 역시 만만치 않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16세기에 태동한 두 학교는 스코틀랜드의 경제성장과 맞물리며 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축적하고, 신학문에 기초한 다양한 교과를 개설했다. 여기에 인재들이 몰리면서 계몽주의 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하게 된다. 에든버러의 별명인 ‘북부의 아테네’가 이러한 학구적 분위기를 상징한다.

     

데이비드 흄이 그 중심에 있었다. 철학사에서 흄은 경험주의의 완성자로 꼽힌다. 그 역시 프랜시스 베이컨과 존 로크가 그랬듯 경험과 관찰에 근거한 엄격한 과학적 지식을 추구했다. 다만 흄은 회의론자라는 점에서 기존 경험주의자들과 달랐다. 그는 경험과 관찰의 유용성을 믿었지만, 그걸로 쌓아 올린 인과적 체계가 진리를 담보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흄에게 인과적 체계란 보편 법칙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습관에 따른 인상과 관념의 다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에서 필연적으로 규정되는 것들이 사실은 ‘개연적’인 것이 된다. 흄의 회의론을 밀고 나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지식이란 인간이 느끼는 감정적 인상에 불과하며, 그것은 이성적 추론이 아닌 경험적으로 “얼마나 그럴듯한가?”의 개연성에 따라 얻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흄이 경험주의와 귀납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과학적 진리를 정당화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그래도 최선인 귀납법을 써야 하는데, 그럼에도 한계는 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관점은 윤리학에도 적용된다. 흄은 도덕이란 곧 감정의 문제이며, 도덕의 옳고 그름은 그 감정이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도덕을 이성이 아닌 감정에 근거하여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흄은 독창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정적으로 유용하다고 느끼면 다 도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도덕은 사회를 전제로 성립한다. 따라서 도덕을 논할 때 다루는 감정은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공감'의 감정으로 한정된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이입될 수 있는 감정만이 도덕 판단의 기준이 됨을 함의한다. 예컨대 남의 슬픔을 보고 나도 슬퍼진다면 그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슬픔이 타인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유용함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회의론에 기초한 흄의 경험주의와 도덕감정론은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도덕을 감정의 유용성 문제로 이해한 그의 윤리학은 제러미 벤담을 필두로 한 공리주의에 영감을 주었다. 개인의 효용 극대화가 사회적으로 옳다고 주장한 공리주의는 오늘날 자유주의의 이론적 원천이 된다. 그것이 태동할 수 있는 계기가 흄에서 시작된 셈이다. 또한 인과적 지식의 가능성을 회의한 그의 독특한 문제의식도 많은 후학이 계승했다. 반증주의로 대표되는 칼 포퍼의 과학철학도 흄의 회의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가 있다. 칸트는 스코틀랜드계 독일인으로서 천문학을 전공했다. 그가 근대철학의 완성자로서 문과계의 GOAT로 꼽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외다. 칸트는 일찍부터 아이작 뉴턴에 심취했고, 『프린키피아』의 정연한 수학적 논리에 큰 감명을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룬 태양계 탄생 가설은 현대 천문학 교과서에도 ‘칸트의 성운설’로 소개될 정도다. 그런 칸트가 철학사에 획을 긋기 시작한 것은 50대 이후다. 그는 경험과 인과법칙의 절대성을 의심한 흄에서 출발해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결과물이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종합하는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로 흄을 꼽는다. “독단이라는 선잠에 빠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라는 언급이 특히 유명하다.

흄은 오늘날 그렇게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창안자 중 한 명으로서 후대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사진은 에든버러에 있는 흄의 동상.



    

자생적 질서가 만드는 조화로운 사회체계

     

애덤 스미스에 이르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정점에 오른다. 흔히 스미스는 경제학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나, 본래 전공은 논리학과 도덕철학이었다. 오늘날 경제학이라고 하면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 시작은 경제 활동, 즉 사람들의 이윤 추구 행위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를 규명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경제학의 기원은 도덕철학과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스미스는 흄의 철학을 발전시켜 독특한 새 학문의 체계를 열었다.

     

자생적 질서는 이를 관통하는 핵심어다. 이것이야말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자생적 질서 개념은 흄의 회의론적 경험주의를 기초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 흄은 이성으로 도덕의 선악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스미스도 이에 동의하는데, - “옳고 그름에 대한 첫 번째 인지가 이성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가정은 터무니없다(『도덕감정론』)” -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상 질서를 추구하는 존재다. 인간은 과학, 도덕, 법률, 시장 등의 사회 제도들도 의도를 갖고 합리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다. 이로써 사회의 질서가 형성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 자신을 과신하는 이성보다 더 좋은 안내자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미스를 위시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단순한 사회이론이나 이성으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 모델을 거부한다. 사회질서란 본연의 도덕감정에 따라 규칙을 형성하고 따르는 인간에 의해 자연스럽게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이를 상징화한 표현이다. 특히 『국부론』을 대표하는 문구로도 널리 알려졌다. 『국부론』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손’만큼은 다 알 정도다(나도 그렇다;;). 매우 함축적인 은유여서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되지만,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동기를 부여받은 인간 행동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조정을 거쳐서 유익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장치.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은 너무 유명해서 오해를 사기도 한다. 이 개념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국부론』이 아닌 『천문학의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도덕철학의 대가인 스미스가 천문학 책을 썼다는 것이 의외다. 하지만 그 시절 대부분 학자가 그랬듯 스미스도 뉴턴의 추종자였다. 그는 과학이론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뉴턴을 천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체계를 제시한 학자로 보았다. 뉴턴의 체계에서 모든 천체는 어떤 의아함도 없이 완벽하게 설명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근대사상의 이과와 문과를 대표하는 두 학자는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오해들

     

이와 관련해 과학사학자 버나드 코헨이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뉴턴의 위엄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문과생들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같은 원리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이다. 코헨은 이를 '뉴턴적 패러다임'이라고 개념화한다. 여기서 뉴턴적이라는 말은 뉴턴의 과학적 방법만을 뜻하지 않는다. 뉴턴이 제시한 새로운 자연관과 거기서 파생하는 정치, 사회, 문화의 관념까지 포괄한다. 스미스 역시 뉴턴의 만유인력과 우주 체계에 기초해서 자신의 사회이론을 구성했다. 즉 스미스는 자연을 특별한 힘을 지닌 능동적 존재로 보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사회체계를 능동적 개별자들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거대한 생명체로 파악한 것이다. 『천문학의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이를 설명하는 은유로서 처음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스미스의 저작에서 두 번 더 나온다. 『도덕감정론』에서 한 번, 『국부론』에서 또 한 번. 그러니까 스미스는 이 개념을 평생 세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날 경제학의 아버지 스미스의 시그니처로 인식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더 오해가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복합적 의미다. 스미스는 종종 이 개념으로 인해 개인의 극단적 이익추구나 적자생존을 옹호하는 냉혈한으로 묘사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지극히 단순하게 해석한 결과다.

     

‘보이지 않는 손’의 이해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흄도 제시했던 ‘공감’의 가치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이를 강조한다. 즉 사회의 가장 근본에 존재하는 도덕률은 공감이며, 타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한에서만 나의 감정과 행위가 인정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바로 이러한 도덕률을 바탕에 두고 작동하는 조정 기제다. 그러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착취해가면서까지 내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이 원칙에 위배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국가가 정의라는 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스미스에게 이 행위는 곧 인간들의 도덕감정을 강제로 실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볼 때 공감의 도덕률에 기초한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들의 상호소통과 사회 참여를 통한 적극적 자유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미스의 초상(오른쪽)과 묘비명(왼쪽). 생전 그가 원했던 묘비명은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였으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로 바뀌었다.



     

그랜드투어와 『국부론』의 탄생

     

1763년 스미스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게 된다. 찰스 타운센드(후일 재무장관이 된다)의 장남 헨리 스콧의 개인교사가 되는 조건으로 교수 월급의 두 배를 평생 준다는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스미스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글래스고대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스콧의 견문을 넓혀주었다. 당시에는 이를 그랜드 투어라고 했다. 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이 사회로 진출하기 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선진국들의 문물을 익히면서 교양을 쌓았다.
    

이때 스미스는 프랑스에 머물면서 백과전서파의 프랑수아 케네와 만났다. 케네는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중농주의의 이론가였다. 중농주의(physiocracy)는 영어 이름에서 보듯 생리학(physiology)의 방법론에 기초한 경제학 사조다. 이는 케네가 의사 출신이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케네는 인체에 체액이 돌듯 국민경제의 각 영역에 자본이 순환하는 경로를 구체화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경제표다. 그는 경제표를 토대로 오직 농업만이 순생산물을 창출할 수 있으며, 정부 통제를 줄이고 자연법 체계에 경제를 맡겨서 농업 생산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액이 원활히 순환하면 인체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는 곧 레세페(laissez faire, let it alone)라 불리는 자유방임주의의 기본 논리가 된다.

      

이미 자생적 질서를 주창했던 스미스는 케네의 이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케네를 비롯한 대륙의 계몽주의자들을 만나면서 경제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스미스는 여행 중에 떠오르거나 토론했던 아이디어들을 틈틈이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1766년, 스콧의 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랜드 투어가 예정보다 빨리 끝나게 된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여행 중 정리했던 생각들을 책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10년 뒤인 1776년 발간된 이 책이 바로 『국부론』이다. 이 책에서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정립한 자생적 질서의 철학적 토대와 중농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자유방임 경제운용원리를 결합했다. 이로써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이 시작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랜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스미스는 친구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어.” 그 심심풀이의 결과물이 바로 『국부론』이다. 스미스의 이 문장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친구에게 말했다는,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와 함께 대가가 자신을 낮춘 겸손의 표현으로 꼽힌다.



     

1776년 세 주역

     

1776년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다. 세계사의 분기점인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해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되고, 제임스 와트의 개량된 증기기관이 출시되었으며, 벤저민 프랭클린이 기초에 참여한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여기에 관여한 세 사람은 출신도, 전공도, 직업도 각기 달랐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교의 교수, 와트는 같은 학교의 수리기사, 프랭클린은 식민지인 보스턴의 인쇄업자였다.

루나 소사이어티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근대사회를 연 과학적 지식들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는 것. 이 버밍엄의 지식인 모임에서 세 사람은 당시 첨단에 있던 과학적 지식을 함께 탐구했다. 와트는 증기기관 개량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보링 기술의 아이디어를 얻고, 스미스와 프랭클린은 신용 화폐로서 지폐의 유통이 갖는 정책적 이점을 공유했다. 이것들은 모두 근대사회의 혁신을 가져올 지식들이었다. 둘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계승자들이었다는 것. 세 사람은 스코틀랜드를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경험과 관찰의 과학적 태도를 중시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이 지역 특유의 세계관을 내면화했다. 이렇게 사회 저변에서부터 지식의 꾸준한 자기 구현이 있었기에,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프랑스혁명처럼 격렬한 투쟁 없이도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 유행했던 자동차 광고의 카피처럼, 소리 없이 강하게 사회의 진보를 이끈 지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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