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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02. 2024

진화론의 사회적 결과, 사회과학의 탄생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 (8)

다윈은 완판남이다. 1859년 11월 24일, 그의 주저 『종의 기원』은 출간 당일에 1,250부가 죄다 팔렸다. 책을 써본 사람은 안다. 초판을 소진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독서인구가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적었을 1859년에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 하루 만에 완판이 되었다. 『종의 기원』이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라서 더 대단하다. 이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 데다, ‘다윈답게’ 방대한 사례와 꼼꼼한 논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핵심 논리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모두가 알아도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지만, 『종의 기원』을 독파한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종의 기원』은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힌 생물학 서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미친 영향력은 생물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윈혁명’이라는 상징적 표현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과학사에서 이름 뒤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다윈 외에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 정도다. 이들은 과학을 넘어 인류 문명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동설, 만유인력 법칙, 상대성이론이 발표될 때마다, 인류는 마치 레이싱 게임에서 부스터를 갈아 끼우듯 역사의 전방으로 급진전했다.



      

다윈혁명의 시대적 맥락

    

다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진화의 개념은 19세기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생물 종을 검토하면서 자연선택의 비밀을 밝힌 다윈의 논증에는,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치밀함과 독창성이 있었다. 다윈 이전에 인류는 두 번의 거대한 지적 충격을 겪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 불과함을 보였다. 뉴턴은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뉘어 있던 이원론을 하나로 종합했다. 여기에 다윈이 진화론으로 결정타를 날렸다. 이로써 인류를 지배해온 신 중심의 세계관은 과학적 사유에 그 지위를 완전히 내주게 되었다.

     

모든 과학적 발견이 그렇듯, 다윈혁명도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겹쳐 보아야 잘 이해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은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37년 빅토리아 시대로 접어들며 패권국가로 부상했다.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는 번영했으며, 기술은 발달한 시대였다. 1851년 런던 엑스포의 주 전시장 수정궁은 그 풍요의 상징이자 정점이었다. 세계 최초로 철골과 유리로만 지은 이 거대한 건축물은 이름 그대로 동화 속 궁전과 같은 화려함을 뽐냈다. 영국의 자랑에 자극받은 프랑스도 1889년 파리 엑스포를 개최하며 에펠탑을 지었다. 그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울름대성당의 2배가 넘는 초고층 건물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아득한 높이는 마치 그 옛날 바벨탑의 재현 같았다. 건축가 에펠은 이 ‘현대의 바벨탑’이 프랑스 과학기술의 위대한 유산임을 자랑하고자, 아치 위에 선배 과학기술자 72명의 이름을 새겼다.

영국에 빅토리아 시대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벨 에포크가 있다. 1889년 준공된 당시 세계 최고층 건축물 에펠탑은 이 시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프랑스의 자랑거리였다.


당시 영국의 번영을 이끈 두 축은 산업혁명과 경제학이었다. 1776년 출시된 와트의 증기기관은 기존 것보다 힘은 더 세고, 연료는 덜 먹었으며, 작동 시간은 더 길었다. 게다가 소형이라서 활용 분야가 넓었다. 이것이 도입되면서 영국의 산업은 근대적 공장제로 재편되었고,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때마침 태동한 경제학이 이러한 발전을 극대화했다. 경제학의 창시자인 맬서스, 스미스, 리카도는 모두 영국인이었다. 고전파로 불린 이들의 논지는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두면 국부는 알아서 늘어난다”라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영국 정부는 중상주의를 추진했다가 미국의 독립으로 호되게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전파 경제학을 새로운 국가정책으로 받아들였는데, 1834년의 신빈민법 제정과 1846년의 곡물법 폐지가 그 상징적 사건이었다. 두 사례 모두 정부 개입은 최소화하고 시장의 경쟁을 유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 전환과 함께 영국의 산업과 경제는 활기를 되찾았다. 유럽 국가들이 동반성장을 이루던 시기였으나, 영국의 성장률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종의 기원』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딱 맞는 것이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를 관통한 자유방임주의, 경쟁을 통한 진보의 논리와 공명했다. 사실 『종의 기원』의 핵심 전제가 고전파 경제학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다. 맬서스가 주창한, “인구와 식량 간 불균형으로 인해 생존투쟁은 필연적이다.”라는 테제가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다윈은 맬서스의 이 냉혹한 논리를 생물의 진화 과정에 원용함으로써 자연선택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

     

19세기 유럽의 발전은 새로운 세계관을 토대로 가능했다. “역사가 끊임없이 진보한다.”라는 의식, 즉 진보사관이다. 오늘날 역사의 진보라는 말은 거의 관용어처럼 쓰인다. 하지만 근대 초기만 해도 진보는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지금의 시간은 과거로 사라질 뿐, 그것이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16세기 과학혁명을 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과학혁명으로 발견된 지식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개입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자연을 개조함으로써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과학에 진보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일갈함으로써 이러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특히 계몽주의자들은 열성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실천했다. 뉴턴의 세례를 받은 그들은 우주의 법칙을 밝힌 이성의 힘으로 사회도 과학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편지공화국으로 교류를 확대하고 『백과전서』를 집필하는 등 실용적 지식의 생산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로크의 자연법, 볼테르의 관용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벤담의 공리주의,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와트의 증기기관, 스티븐슨의 철도 등의 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일견 무모해 보였던 계몽주의자들은 결국 절대왕정을 무너뜨렸고, 기계제 대공업이라는 성장동력을 만들어냈다. 그런 그들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다.

     

물론 계몽주의자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역사의 진보를 설파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등장한 철학의 새 흐름이 계몽주의자들의 역사관에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다. 그것은 베이컨에서 시작된 진보의 관념을 더욱 체계화, 정교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헤겔이 그 최선두에 있었다. 그는 칸트와 피히테로 이어진 독일 근대철학을 계승했고, 이를 다시 역사철학이라는 거대한 체계로 완성한 대학자였다. 이 역사철학에서 두 축을 이루는 것이 관념론과 변증법이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이 세계의 근본을 이룬다고 본다. 그리고 정신은 모순의 대립과 지양을 반복하며 발전한다. 헤겔은 이러한 관념론과 변증법을 결합하여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논증한다. 헤겔에게 역사란 인간 정신의 자기실현, 즉 정신이 스스로 본질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정신의 본질은 곧 자유다. 물질의 본질이 중력이듯 정신은 자유를 통해 실체화된다. 따라서 역사 발전은 자유 의식의 확대 과정이다.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한 사회 제도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온 과정이 곧 인류의 역사다. 그런데 이는 우연이 모인 결과가 아니며, 영웅이 고군분투해서 이뤄낸 업적도 아니다. 이성이 지배하는 합법칙적, 필연적인 과정이다.

    

헤겔은 역사가 3단계로 발전한다고 했다. 첫째 단계는 동양의 전제정치다. 이때는 오직 전제 군주 한 명만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 둘째 단계는 그리스의 민주정치, 로마의 귀족정치다. 특정 신분을 가진 소수가 자유로웠던 시기다. 셋째 단계는 게르만(정확히는 헤겔의 조국인 프로이센)의 입헌군주정치다.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졌다. 요컨대 역사는 중국, 인도, 페르시아 등에서 시작해,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유럽의 근대국가에서 완성된다. 근대국가는 이성적으로 제정된 법률에 따라 통치되며, 개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정신의 자기실현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렇듯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자유의 확대와 동일시한 헤겔의 논지는 계몽주의의 역사관과도 상통했다.

헤겔은 관념론과 변증법을 종합하여 역사가 진보한다는 역사철학을 완성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한 사회주의 진보사관으로 이어나갔다.



     

사회과학의 태동

     

헤겔처럼 역사를 법칙에 따라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역사를 과학화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듯,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사회의 법칙 또한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비단 자연만을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게 된다. 사회 또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콩트가 이런 생각을 체계화했다. 콩트의 목표는 역사를 바탕으로 인류의 발전 과정까지 예견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 기획을 사회물리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사회현상을 물리학적 대상처럼 다룬다는 의미다.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라는 유명한 테제가 그렇게 도출된다. 이로써 사회물리학은 물리학이 그러하듯 사회 발전의 불변적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콩트에 의하면 이는 인류의 정신적 진보가 신학과 형이상학을 거쳐 최고 수준인 실증주의 단계에 도달해야 가능하다. 즉 현상의 원인을 그저 탐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현상의 유사성과 연속성에 근거하여 객관적 법칙을 도출하는 것이 사회연구의 목표가 된다. 이 법칙을 이용하면 심지어 인간이 사회를 자유롭게 개조할 수도 있다. 콩트의 사회물리학은 이후 사회학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학의 아버지로 콩트를 첫 손에 꼽는다.

     

하지만 진보사관의 득세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역시 다윈이었다. 헤겔, 콩트가 진보의 철학을 세웠다지만 사변적 논의일 뿐이었다. 반면 다윈이 제시한 생존투쟁과 자연선택의 논리는 과학의 법칙이었다. 다윈은 생명의 진화라는 인류 궁극의 테마를 생물학은 물론 지질학, 경제학과도 결합해서 독창적인 방식으로 정식화했다. 바로 여기에 다윈이 완판남이 된 비결이 있다. 사람들은 『종의 기원』을 단순히 생물학 서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원리는 사회와 역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담지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과학의 법칙으로 사회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19세기에는 이미 일반적이었다. 역사학자 헨리 토머스 버클의 말이다.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연구해 그 규칙성을 찾아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회를 같은 방법으로 연구해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진보사관은 19세기 후반 스펜서와 마르크스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더욱 정교해졌다. 스펜서는 콩트를, 마르크스는 헤겔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은 비슷한 시기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과 상호작용하며 과학으로서의 정당성을 갖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콩트는 사회현상을 과학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실증주의 철학을 창안했다. 스펜서는 여기에 진화론의 문제의식을 더하여 자유주의 진보사관으로 완성했다.

    

흔히 스펜서는 다윈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의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진화 개념을 사회연구에 접목한 것은 『종의 기원』 출간 이전이다. 스펜서는 사회가 진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이 바로 적자생존이라고 했다. 오늘날 이 용어를 다윈의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은 스펜서가 원저작자다. 적자생존은 말 그대로 무한경쟁에서 적응한 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원리이다. 본래 다윈은 자연이 반드시 적자나 강자만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자생존은 자연선택과 다르다고 보았지만, 둘이 같은 개념이라는 스펜서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적자생존은 결국 자유방임주의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스펜서도 고전파 경제학과 맥을 같이 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적 행위에 개입하는 원인은 너무 복잡하고, 그 결과도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모든 일은 스스로 이루어지게 놓아두어야 한다는 것이 스펜서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두면 적자생존 메커니즘에 의해 열등한 자들은 도태되고 우수한 자들만 살아남으면서 사회가 발전해 나간다. 이것이 스펜서가 체계화한 자유주의적 진보의 논리였다.

     

반면 마르크스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진보의 필연성을 논증했다. 그는 역사 발전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을 수용했지만, 관념론에는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물질적 이해관계가 관념과 사상, 그 연장으로서의 정치와 국가까지 지배한다고 보는 유물론을 도입했다. 노동자는 노동자에게, 자본가는 자본가에게 걸맞은 의식을 갖는다는 의미다. 즉 “인간의 의식이 그들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 의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는 이성이나 정신처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실체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에 따라 발전한다. 다만 마르크스는 이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인간이 의지를 갖고 모순을 극복하고자 실천을 해야 한다. 그럼 누가 그런 실천을 하는가? 계급이 바로 그 주체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곧 노동자 계급이다. 이러한 피억압 대중이야말로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도 비슷한 시기 등장한 다윈에 대해 호평했다. 자신이 창안한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계급투쟁론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필생의 목표가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었음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다윈에의 호의가 이해된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프랑스 등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를 공상적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론이야말로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진화론은 과학만의 뜨거운 감자가 아니었다. 19세기 유럽의 발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한 진보사관도 과학 못지않게 진화론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콩트-스펜서, 헤겔-마르크스로 나뉜 두 흐름은 진보의 양상과 주체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정의했으나, 과학의 법칙에 따라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았다. 비로소 사회‘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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