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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07. 2024

인류 지식의 최전선을 넘어서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1)

2020년 9월, 이례적으로 과학 뉴스가 언론의 메인을 장식했다. 한국인 과학자가 그해 노벨화학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였다. 과학자의 이름은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의 나노입자 연구단장 겸 서울대 석좌교수였다. 이 보도가 국뽕과 설레발의 콜라보는 아니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라는 학술정보 분석 업체가 최상위 논문의 피인용도를 계산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이전에도 같은 방식으로 노벨상 수상자를 맞춘 사례가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국민의 관심이 현택환 단장에게 쏠렸다. 발표 당일까지 언론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의 대선 후보 수준으로 보도했다. 노벨상, 특히 과학상은 국가적 염원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만 해도 27명이 노벨과학상을 받았다. 게다가 1인당 GDP가 우리나라보다 낮은 중국, 인도, 대만, 파키스탄 등에도 수상자가 나왔다. 그러니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자타공인 선진국인 우리나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하지만 그때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현택환 단장은 축구로 치면 손흥민 같은 월드클래스다. 나노기술이라는 메이저 무대에서, 최고급 저널에 손흥민이 공격 포인트를 쌓듯 논문을 낸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수상을 기대할 만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결과는 기대를 벗어났다. 수상의 영광은 제니퍼 다우드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라는 두 외국인에게 돌아갔다. 비록 한국인 최초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이 해의 노벨화학상은 여러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 수상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120년이 넘는 노벨과학상 역사에서 여성 수상자가 몇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오직 여성들만으로 수상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둘째로 아직 포텐이 다 터지지 않은, 개발 가능성이 더 큰 연구성과가 수상했다. 두 사람의 업적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작동 원리 규명이었다. 유전자 가위는 현대 생명과학의 가장 핫한 기술로서, DNA를 잘라 염기서열을 교정하는 도구다. 그중 크리스퍼는 이제껏 개발된 가장 예리한 유전자 가위다. 1987년 우연히 발견된 후 기술적 정교함이 급진전해서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 미생물에까지 쓸 수 있다. 의학적으로는 질병의 원인 유전자를 제거함으로써 난치병 치료가 가능하다. 우량한 가축과 병충해에 강한 농작물도 생산할 수 있다. 심지어 미용에도 쓰이는데, 탈모의 원인 유전자를 알아내면 대머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요컨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을 후천적으로 바꾸는 꿈의 기술이다. 만약 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인간은 진화의 산물에서 벗어나 그 설계자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작동 원리를 규명한 제니퍼 다우드나(오른쪽)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왼쪽)는 120년 노벨과학상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들끼리 수상했다.



     

노벨상 수준의 연구가 일상인 연구소

     

다우드나와 샤르팡티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또 있다. 바로 세계적 유명 연구소 출신이라는 것. 수상 당시 다우드나는 미국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 샤르팡티에는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Institut, 이하 MPI)에 재직 중이었다. 특히 샤르팡티에는 오랫동안 비정규직으로서 미국과 유럽의 연구소들을 전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다 2015년 막스 플랑크 감염생물학 연구소에 정착하면서 세계적 석학으로 올라섰다. MPI에서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정도 연구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노벨과학상 수상이 요원한 것과 달리, 독일은 이 연구소에서만 이미 수십 명이 받았다. 2020년만 해도 화학상의 샤르팡티에는 물론, 물리학상의 라인하르트 겐첼도 역시 MPI 소속이었다. 겐첼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으로 20년 넘게 관측해서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했다. 그러니까 한 해에만 두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같은 연구소에서 나온 셈이다.

     

실제로 MPI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연구소, 세계 연구소계의 셀럽이다. 과학에 순위를 매기는 게 웃기는 일이지만, 그래도 세계적 연구소라고 하면 보통 이곳을 첫 손에 꼽는다. 인터넷에서 흔히 하는 말로 “모르면 외우세요”라고 해도 될 정도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연구해보고 싶어 한다. 그 경력만으로도 엄청난 스펙이 된다. 과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이곳이 심심하면 노벨상을 받는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언론이 이 연구소를 “노벨상사관학교”라는 별칭으로 소개하는 이유다. 이제껏 받은 노벨상 수도 어마어마하지만, 앞으로 받을 만한 최첨단의 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인류 지식의 최전선이다.

     

막스 플랑크 협회(Max-Planck-Gesellschaft, 이하 MPG)가 그 본부 역할을 한다. MPI는 MPG의 산하 연구조직으로서 독일 전역에 84개가 있다. 이들은 분야별로 나뉘는데, 이름을 보면 뭘 연구하는지 알 수 있다. 막스 플랑크라는 공통명칭 뒤에 연구하는 주제명이 들어간다. 예컨대 막스 플랑크 천문학 연구소, 막스 플랑크 화학 연구소,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 하는 식이다. 따라서 막스 플랑크 연구소(MPI)라고 하면 본부에 소속된 개별 연구소들을 의미한다. 이들을 집합 단위로 총칭하려면 막스 플랑크 협회(MPG)라고 해야 한다. 뮌헨의 MPG 본부가 전국에 산재한 84개 MPI를 총괄 지원한다. 즉 연구는 MPI들이 하되, 공동의 의사결정이나 정책·사업 추진은 MPG에서 이루어진다. 요컨대 독일의 정치체제인 연방제와 비슷하다. MPI가 주정부라면, MPG는 연방정부다.

뮌헨에 있는 막스 플랑크 협회 본부(위쪽)와 전국 84개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분포도(아래쪽)



     

독일의 학술연구 전통

     

MPG는 학술과 연구를 중시하는 근대 독일의 전통을 반영한다. 1871년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과학을 육성하는데, 그 방향이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달랐다. 영국은 근대과학의 발상지이면서도 국가가 과학에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극히 적었다. 그보다는 개인들의 아마추어 연구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프랑스는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과학을 육성했으나, 주로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독일의 과학은 일찍부터 순수 학문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적 학풍이 강했다. 그래서 연구중심대학이 발달했고, 더 나아가 과학자들이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체제까지 논의되었다. MPG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국가 연구소다. 이는 특히 세 가지 지표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로 역사다. MPG의 전신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로, 1911년에 창설(1948년 막스 플랑크 협회로 변경)되었다. 무려 1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쯤 동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이 망했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국운을 다해가고 있었다. 즉 몇백 년을 이어온 전제 군주제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바로 그때 독일에서는 한 세기가 넘도록 명성을 날릴 현대적 연구소의 포석을 놓은 것이다.


둘째는 노벨상 수상자다. 노벨상은 인류 지식을 근본적으로 확장한 순수과학, 기초연구의 성과에 주로 주어진다. 이는 특히 학문의 자유와 진리 탐구를 중시한 MPG의 설립 철학과 잘 부합했다. 2024년 현재 기준 31명의 MPG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았다. 연구소 역사가 113년이니, 단순 계산으로 3.6년마다 한 명씩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셈이다. 그러니까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는 것보다 이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받는 주기가 더 짧다.

      

셋째는 예산이다. MPG 2021년 총예산은 2.8조 원이다. 재원의 대부분이 독일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공공자금이다. 이 금액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니, 이렇게 비교해 보자. 2024년 우리나라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연구사업비는 총 2.1조 원이다. 이것도 지난 5년 사이에 거의 두 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대학, 연구소, 기업 등이 나눠 갖는 전체 기초연구비를 탈탈 털어도, MPG 한 곳에서 쓰는 예산에도 못 미친다.

      

독일에는 MPG 외에도 세 개의 연구 협회가 더 있다. 프라운호퍼 협회, 헬름홀츠 협회, 라이프니츠 협회가 그들이다. 이들도 MPG와 마찬가지로 국가 지원을 받으며, 산하에 개별 연구소들을 둔다. 그리고 각자 미션에 특화된 연구를 한다. MPG(84개 연구소)는 기초학문, 프라운호퍼 협회(76개 연구소)는 산업·응용기술, 헬름홀츠 협회(19개 연구소)는 거대과학, 라이프니츠 협회(87개 연구소)는 학제 간 융합연구를 맡는다. 이 연구소를 다 합치면 266개라는 어마어마한 규모가 된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소의 수는 25개이다.

막스 플랑크, 프라운호퍼, 헬름홀츠, 라이프니츠는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협회로서 산하에 별도 연구소들을 두고 대학과 차별화되는 연구를 한다.


협회의 명칭도 인상적이다. 모두 저명한 독일인 과학자의 이름을 땄다. 서구권에서 뛰어난 자국 과학자의 이름을 연구소에 붙이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유명세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보여준 사회에의 헌신을 계승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에 내놓을만한 과학자가 없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다. 만약 우리가 한국인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국가를 대표하는 연구소를 만든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면서 외국에서도 충분히 알만한 과학자가 있을까? 슬프지만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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