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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14. 2024

지식은 응용을 앞서야 한다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2)

연구소의 정체성은 분야와 주제가 결정한다. 그만큼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이 점에서 MPG를 드러내는 핵심 키워드는 ‘기초’이다. MPG는 과학의 방대한 영역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기초학문을 연구한다. 2대 회장 막스 플랑크는 그 철학을 이렇게 요약했다. “지식은 응용을 앞서야 한다(Insight must precede application).” 따라서 MPG는 특정한 활용을 전제하지 않는, 지식 획득 자체가 목적인 연구를 지향한다. 그래서 호기심과 자율성은 MPG에서 가장 존중받는 가치다.

     

MPG의 연구분야는 크게 다섯 가지다. 천문학·천체물리학, 생명과학·의학, 물질·기술, 환경·기후, 인문학. 이건 어쩌다 보니 나온 결과가 아니다. 1975년 MPG는 과학자문위원회를 열어 연구분야 선정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미개척 분야, 또는 여러 분야가 서로 접목되는 분야다. 이는 대학에서 하지 않거나, 대학에 정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특수 거대 설비 또는 막대한 자원이 필요한 분야이다. 즉 국가의 공공투자가 아니면 수행하기 어려운 분야를 의미한다. 요컨대 MPG는 국가 연구소로서 대학, 기업 등이 하기 힘든 고난도, 고비용의 대형 연구를 전담한다고 할 수 있다.

막스 플랑크 전파천문학 연구소가 운영하는 전파망원경. 직경이 100m에 달하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이렇듯 MPI는 대학이 하지 못하는 고비용 대형 연구에 특화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문학도 비중 있게 연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라는 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상통한다. 근대 초기만 해도 과학자는 철학자였고, 철학자도 과학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근대정신을 설계한 볼테르, 로크, 칸트는 과학자 뉴턴으로부터 배웠고,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수학으로 보편철학을 완성하고자 했다. 오늘날 과학의 전문화와 문‧이과 분리 교육으로 인해 두 학문이 별개로 여겨지지만, 별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에 문리과대학이 있었다. 지금의 인문대, 사회과학대, 자연과학대가 합쳐진 문리과대학은 서울대의 높은 학문적, 사회적 위상을 상징했다.

     

현대과학은 오히려 인문학을 중요한 협력의 파트너로 삼고 있다. 인지과학, 신경과학, 사회생물학 등이 그러한 경향을 선도하는 분야들이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처럼 인문학의 관점에서 과학을 탐구하는 학문도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MPG는 법, 역사, 사회, 정책 등의 연구소들도 적지 않은 비율로 두고 있다. 오래전 문‧이과 사이에 높은 담장을 쌓아 올린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과학자에게 주는 막대한 권한


MPG는 대규모 조직이다. 뮌헨 본부 및 전국 84개 연구소에 근무자만 2만 4천 명에 이른다. 다 모으면 웬만한 소도시 인구 정도 되는 셈이다. 인적 구성도 다양하다. 연구소라고 해서 과학자만 있는 건 아니다. 실험시설과 장비를 관리하는 엔지니어, 사무를 보는 행정직원, 그리고 과학자에게 수련받는 박사후연구원과 대학원생들도 있다. MPG는 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복잡한 체계에 소속되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기계와 같다.

     

그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MPG 전체를 한눈에 담기는 어려우므로, MPI 단위로 좁혀서 보자. MPI들은 연구하는 분야는 제각각이어도 조직과 체계의 구성은 대동소이하다. 연구의 특성과 방법에 따라 규모가 크거나 작아질 뿐이다. 그런데 하나의 MPI가 포괄하는 분야도 꽤 크다. MPI 명칭에 붙는 분야명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물리학, 화학, 천문학, 뇌, 수학, 핵물리 등이다. 그래서 MPI는 다시 이러한 메인 주제의 세부 분야를 연구하는 조직들의 연합으로 구성된다. 이 조직들은 역할에 따라 크게 연구부서(department)와 연구그룹(research group)으로 나뉜다. 여기에 은퇴한 명예 연구자들, 외부 초빙 연구자들로 구성되는 소규모 조직도 있다. 이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연구를 행정‧기술지원 조직이 뒷받침한다.

     

연구부서는 MPI의 중추를 이루는 정규 조직이다. MPI가 존재하는 한, 이 부서들도 영속적으로 유지된다. 각 MPI에는 적으면 2~3개, 많게는 6~7개의 연구부서가 있다. 연구부서의 수장을 디렉터(director)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연구를 지휘하는 총책임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MPG를 대표하는 핵심 인재들이다. 엄격한 평가를 통과한 세계적 과학자가 디렉터로 선발된다. MPG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의 대부분도 이들이 차지한다.

     

디렉터는 학문적 권위만큼이나 높은 위상을 갖는다. MPG의 트레이드 마크인 “우수한 과학자에게 절대적 자유를 보장한다.”라는 철학을 바로 이들이 체현한다. 실제로 디렉터는 MPG에서 극소수만 얻을 수 있는 정년을 보장받는다. 대학으로 치면 테뉴어 심사를 통과한 정교수인데, 연구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MPG는 이 비율이 굉장히 낮다. 전체 연구인력의 5%가 채 안 되는 디렉터와, 디렉터가 테뉴어를 대가로 영입하는 일부 인력을 제외하면, 정년까지 연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     

차미영 카이스트 교수 겸 기초과학연구원 그룹리더(왼쪽 두 번째)는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디렉터로 선임되었다.

     

소수에 불과한 디렉터가 연구소 운영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연구·인사·예산 등에 절대적 권한을 행사한다. 즉 무엇을 연구할지, 누구를 뽑을지, 얼마나 자원을 투입할지를 모두 결정한다. 게다가 MPG의 과학 회원(scientific member) 자격도 갖는다. 과학 회원은 전체 MPG의 운영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단위이다. 대부분 전·현직 디렉터들로 구성된다.

     

MPI는 이러한 디렉터들이 공동운영하는 협의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구소장(managing director)은 큰 의미가 없다. MPI에서 연구소장은 디렉터 중 한 명이 맡는데, 일종의 봉사직이다. 그것도 서로 돌아가면서 한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디렉터 협의기구(board of directors)에서 이루어진다. 즉 MPI의 운영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부출연연구소보다는 대학과 더 비슷하다.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학과장을 맡으나, 학과 운영에는 교수들의 의견이 다 같이 반영되는 구조다. 연구소장이라고 해서 다른 디렉터를 묵살하거나,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성장과 협력

     

연구그룹도 MPI의 중요한 조직이다. 연구부서가 큰 변동이 없는 골간 조직이라면, 연구그룹은 유동적인 태스크포스팀에 가깝다. 이는 MPI별로 다양한 목적에 따라 운영된다. 다만 공통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젊은 과학자들의 연구그룹이다. MPI는 대학의 정교수에 해당하는 디렉터 못지않게, 부·조교수급에게도 독립연구의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여기에 부합하는 조직 형태가 연구그룹이다. 소규모로 운영되기 때문에 젊은 과학자들이 도전적 연구를 펼치는 데 유리하다.

    

연구그룹의 수장을 그룹리더라고 한다. 이들은 2~10명의 박사후연구원, 학생 등을 데리고 그룹을 운영한다. 상사인 디렉터가 자기 예산을 일부 떼어주거나, 기업 등에서 펀딩을 받아서 재원을 확보한다. 어디서든 신참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MPI 연구그룹은 신진급도 본인이 주도해서 연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MPG의 세계적 경쟁력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젊은 과학자들을 키우는 능력은 독보적이다. 그룹리더 출신 중에 약 11%가 MPI의 디렉터로 성장한다는 통계도 있다. 외국 출신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교수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로 될성부른 떡잎들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원도 빼놓을 수 없다. “연구소에 웬 대학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학생이 없다면 연구소라는 조직은 돌아갈 수가 없다. 실험 수행과 논문 작성 등 대부분의 연구 과정에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논문의 1저자는 학생이, 교신저자는 디렉터나 교수인 경우가 많다. 다만 MPI는 교육 이수 과정이 없는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학과 협력해서 학생들을 활용한다. MPI 건물이 대부분 대학 안이나 근처에 있는 이유다. 디렉터들도 대학의 교수직을 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인데, 대학과 연구소 두 기관에 이중으로 소속되어 교육과 연구 업무를 병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MPI의 디렉터는 소개 문구가 Prof. Dr. 0000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학연협력 모델은 MPI만의 특징이 아니다. 독일의 많은 연구소가 대학과 협력하고 있으며, 연구와 교육의 시너지는 독일 지식체계의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그래서 독일의 과학기술 주무 부처는 교육 업무도 함께 관장하는 연방교육연구부(Bundesministerium für Bildung und Forschung, BMBF)다.      

튀빙겐에 있는 3개 MPI와 튀빙겐대학교의 거리는 불과 2km 남짓이다. MPI는 원활한 학연협력을 위해 대부분 대학 근처에 위치한다.


이런 배경에서 MPI는 국제대학원(International Max Planck Research School, 이하 IMPRS)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MPI에 전 세계의 우수한 학생들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입학생은 대학과 MPI 두 곳에 소속되며, 지도교수도 대학교수와 MPI 과학자 두 명이 맡는다. 학위과정은 대학에서 이수하되, 실험과 연구는 MPI에서 한다. 이런 이중 시스템은 학생에게도 큰 장점이 된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국가 연구소의 특수 장비를 이용하거나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MPI가 IMPRS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으로 박사학위과정을 밟는 학생만 2천 명이 넘으며,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다.

    

지금까지 알아본 MPI의 조직 구조를 실제 사례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이미지는 막스 플랑크 화학 연구소(MPI for Chemistry)의 조직을 요약한 것이다. 1912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전체 MPI 중에서도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막스 플랑크 화학 연구소의 조직 구조


막스 플랑크 화학 연구소의 연구부서는 4명의 디렉터가 각각 대기화학(atmospheric chemistry), 기후지구화학(climate geochemistry), 다중상화학(multiphase chemistry), 입자화학(particle chemistry)을 맡는다. 연구그룹도 4개가 있다. 주로 디렉터의 분야와 연계된 기후와 대기 관련 연구를 수행한다. 이러한 구성에서 보듯, 연구부서는 기초 및 기반학문들을 연구하고, 연구그룹을 통해 이를 특정 주제들에 적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행정‧기술지원 파트(홍보, IT, 엔지니어링 등)도 있다. 물론 이 사례는 84개 MPI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여타의 MPI도 규모의 크고 작음만 다를 뿐, 구성은 이 연구소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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