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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05. 2024

제국의 브레인, 카이저 빌헬름 협회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3)

MPG의 역사는 1911년 시작된다. 카이저 빌헬름 협회(Kaiser-Wilhelm-Gesellschaft, 이하 KWG)라는, 제국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연구소가 전신이다. 이름의 카이저 빌헬름은 독일 제국의 3대 황제인 빌헬름 2세를 뜻한다. 빌헬름 2세는 우리나라에서 지도자보다는 특유의 ‘카이저 수염’으로 더 유명하다. 양 끝이 꼬여서 위로 치솟은 그의 수염은 당시 유럽 상류층에서 선풍적 인기였다. 어찌나 인기였는지, 훗날 게임 캐릭터인 슈퍼마리오가 따라 할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황제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이런 고풍스러운 스타일을 고수했다. 재임 중 초상화를 봐도 대부분 근엄한 군복 차림이다.

     

실제로 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이자 철저한 제국주의자였다. 본래 독일 제국은 유럽 안정의 중재자로서 실리외교를 지향했다. 이것은 초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전쟁보다 외교로써 독일의 안정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며 이런 기조가 뒤바뀌었다. 어릴 때부터 군대를 좋아한 그의 꿈은 독일을 대영제국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독일”이라는 통치 슬로건을 내세우며 강력한 세계정책을 천명했다. 이러한 정책에 비스마르크는 반대했으나, 빌헬름 2세는 건국 공신인 그를 해임해버렸다. 그리고는 자기 뜻에 잘 따르는 인사들로 내각과 군부를 채웠다. 이로써 독일은 해외시장과 식민지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빌헬름 2세는 타고난 제국주의자로서 황제의 위엄을 강조하는 스타일을 고수했다.


1911년 독일이라는 배경

     

KWG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모든 사회 제도가 그렇듯 연구소도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어떤 제도가 배태되는 과정에는 그를 둘러싼 사회정치적 요인들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KWG라는 국가 연구소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과학만으로는 이 연구소가 만들어진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1911년의 독일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연관된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부국강병 정책이다. 20세기 초는 온 유럽이 제국주의로 달려가던 시기다. 이러한 경쟁에 명함이라도 내밀려면 부국강병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완수한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앞세워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에 비하면 독일은 한참 후발주자였다. 그래서 빌헬름 2세의 최대 관심사는 산업 진흥과 해군력 증강에 있었다. 최고 통치자가 이러했으니, 과학 연구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 2세는 과학을 부국강병의 기초이자 국가의 예로 인식했고, 그래서 과학자를 우대했다. 일례로 1895년 빌헬름 뢴트겐에게 X선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런 분위기에서 부국강병의 ‘브레인’ 역할을 해줄 과학자 집단의 필요성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둘째는 산업혁명이다. 농업국가였던 독일은 19세기 중반 석탄, 제철, 전기공업 등의 성장과 함께 비약적인 산업화를 이뤘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는 알자스-로렌 지방이 당시 대표적인 공업지역이었다. 이렇게 산업이 발달하자, 여기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1887년 베를린에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의 목적은 산업에 필수적인 기술 표준을 정하는 데 있었다. 미국, 영국 등과 경쟁하던 독일의 전기, 화학기업들이 엄밀한 측정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를 충족하고자 국가가 발 벗고 나섰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최초의 근대적 국가 연구소로 꼽힌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역으로 그 시대에 보편적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실제로 20세기 초만 해도 국가가 과학 연구를 지원한다는 발상은 낯설었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에서 과학은 돈 많은 부유층이 사비로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이와 다르게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사례에서 보듯) 국가가 과학을 포섭하고 제도화하는 경향이 커지게 된다. 이 과정이 부국강병의 요구와도 공명했음은 물론이다.

사실주의 화가 아돌프 맨첼의 그림 <압연 공장 : 현대의 키클롭스들>.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독일 제철 산업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셋째로 대학의 혁신이다. 19세기 독일 대학에서는 빌헬름 폰 훔볼트를 위시한 신인문주의자들의 주도로 학풍과 제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학문의 본질에 충실한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 순수한 진리 탐구 등으로 요약되었다. 그 결과 대학교수는 교육자이면서 연구자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유능한 학자를 교수로 초빙하려는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로써 독일 대학의 기능은 교육보다 연구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교수는 강의도 해야 하지만, 자신의 연구도 수행하고 대학원생들을 연구자로 키우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그래서 교수의 사비를 통해서나 유지되던 실험실이 대학의 연구체제로 확립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연구중심대학의 기원이다. 연구자의 독립적 연구 능력을 인증하는 박사학위 제도는 바로 이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독일 정부는 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고, 이는 국익을 위한 투자이자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교수와 연구자들이 강의 부담에서 벗어나,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대학보다는 연구소라는 조직 형태가 적합했다.

     

넷째로 기초연구에 대한 인식이다. 20세기 산업혁명이 급진전하면서 과학 연구에도 분화가 일어났다.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또는 과학과 공학이라는 구분이다. 즉 독일의 급격한 산업 발전은 물리학과 수학보다는, 기계, 전기, 금속공학 등의 학문적 수요를 더욱 자극했다. 그 결과 기술학교로 운영되었던 고등공업학교들이 공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베를린 공과대학이 대표적이다. 1879년 문을 연 이 학교는 1885년 최초로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것이 독일 공과대학의 기원이 되는데, 특히 제국물리기술연구소와 교류하며 뛰어난 성과들을 냈다. 1900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막스 플랑크가 이룬, 흑체복사 현상의 실험과 이론 불일치를 양자화된 에너지 개념을 도입해 해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발견은 후일 양자역학의 출발점으로 기록된다. 이렇듯 신학문으로서의 공학은 빠르게 과학과 동등한 지위에 올랐다. 다만 이는 연구자금과 일자리라는 생존 조건의 확보에 있어서 기존 과학자들에게는 위기였다. 이들이 공학, 또는 응용연구와 차별화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기초연구였다. 과학사가 데시리 슈아즈에 의하면, 기초연구 개념은 이렇듯 19세기말의 특수성에서 학문적 필요보다는 정치적 배경에서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공학과는 구분되는 영역에서 안정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하르낙 원칙 : 재정 지원과 운영 자율성

     

KWG는 이러한 시대적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베를린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이 설립 과정을 주도했다. 빌헬름 2세의 고문이기도 했던 그는 1909년 독일 과학 연구체제의 혁신을 위한 제안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학과 차별화되는, 과학자들이 강의 부담 없이 연구에만 전념하는 독립적 기관이 필요하다. 이 연구소는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의 전문적 기초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급속한 산업화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물리학, 화학의 더 많은 원리를 밝힘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생물학과 의학에서도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제안서에서 하르낙은 미국의 과학 투자를 언급했다. 당시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미국에서 연구와 교육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 1902년 카네기 연구소가 출범했다. 그러니까 독일도 이런 사례를 본받아 대형 국가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만 이것은 하르낙의 오해에 가까웠다. 미국의 연구소 설립은 (이름에서 보듯) 국가가 아니라 민간 자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사학자 우시오기 모리카즈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학문과 연구는 세금이 아니라 자선사업으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과학이 세계무대에 나선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국가가 주도하는 과학 투자는 그보다 늦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이었다.

     

빌헬름 2세는 하르낙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910년 베를린대학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 “학생을 가르칠 의무가 없는 연구소를 만들겠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교육이 연구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퍼지던 때라, 황제의 선언은 큰 호응을 얻었다. 이듬해 카이저 빌헬름 협회 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기부금도 받기 시작했다. 황제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서인지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설립에 앞장섰던 전기회사 지멘스와 철강회사 크루프가 큰돈을 내놨고, 화학업과 은행들도 동참했다. 연구소의 건설 부지로는 베를린 외곽 달렘의 국유지를 제공받았다.

1913년 카이저 빌헬름 협회를 시찰하는 빌헬름 2세와 아돌프 하르낙(오른쪽 끝)

초대 회장으로는 하르낙이 선임되었다. 그의 본업은 신학자였지만, 과학행정가로서 수완도 뛰어났다. 그래서 협회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훔볼트의 신인문주의, 산업계의 기술 수요, 정부의 부국강병 요구 등을 적절히 결합했다. 연구자금 조달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하르낙의 통찰이 가장 빛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KWG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지만, 운영에 있어서 간섭받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즉 “우수한 과학자를 뽑아서 운영의 전권을 맡긴다.”라는 것이 하르낙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우수성과 자율성에 대한 강조가 현재의 MPG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하르낙 원칙’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이기까지 한 시도였다. 국가가 만든 조직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뜻에 따라 운영되어야 했다. 하지만 하르낙은 지원과 운영을 엄격히 구분했고, 빌헬름 2세를 위시한 정부 인사들도 이러한 방침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KWG는 초기부터 재정적 안정성과 학문적 자율성이라는 연구소 운영의 두 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수한 인재의 결집

     

갓 출범한 KWG는 탄탄한 재정과 자율적 연구를 앞세워 인재를 끌어모았다. 1912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화학연구소부터 그러했다. 화학연구소는 크게 세 부문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무기화학 부문 소장에 취임한 에른스트 오토 베크만은 미세한 온도 변화도 정밀 측정하는 베크만 온도계의 발명자였다. 유기화학 부문 소장 리하르트 빌슈테터는 1915년 식물의 엽록소와 안토시아니딘에 대한 연구로 KWG 최초의 노벨상(화학상)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방사선 부문 소장은 오토 한이었다. 리제 마이트너와 함께 연구실을 꾸린 그는 후일 핵분열을 최초 발견했고,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원자력의 상용화로 이어졌다. 한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KWG가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칭한 뒤 첫 회장을 맡아 12년을 재임하게 된다.

     

1912년에는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도 출범했다. 다만 화학연구소와 달리,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는 설립할 예산이 부족했다. 이때 유대인 기업가 레오폴드 코펠이 막대한 기부금을 내서 연구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코펠은 기부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는데, 어떤 유대인 화학자를 연구소장으로 선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프리츠 하버다. 당시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카를스루에 공과대학 교수로 있었다.

1912년 베를린 달렘에 건설된 카이저 빌헬름 협회의 화학연구소(왼쪽)와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오른쪽)

하버는 아이작 뉴턴이나 찰스 다윈만큼 유명하지는 않으나, 인류에 대한 기여라는 점에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학자다. 인류사의 영원한 난제였던 기근을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저 유명한 토머스 맬서스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라는 명제(이른바 맬서스 트랩)가 정설로 인정받던 시대였다. 그만큼 식량부족이 인류 공동의 문제였고, 선진화된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본적 이유는 공기의 78%를 차지하는 질소에 있었다. 농작물이 잘 자라려면 질소를 비료로 공급해주어야 하는데, 질소 원자들이 3중으로 단단히 결합해 있어서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번개나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자연적 방법으로 일부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거기에만 맡겨서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들어 많은 학자가 수소(H₂)와 질소(N₂)를 결합해 암모니아(NH₃)를 얻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달려들었다. 암모니아는 합성비료의 원료로서 즉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확실한 성공을 거둔 인물이 하버다. 하버는 1913년 화학기업 바스프의 엔지니어 카를 보슈와 함께 고온‧고압 상태에서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해 대량의 암모니아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 질소비료의 공급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량의 2배를 기록하게 된다. 맬서스 트랩이 완전히 깨진 것이다. 이 하버-보슈법을 고안한 공로로 하버는 191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는데, 그 시상 연설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하버 교수님, 왕립과학원은 수소와 질소를 직접 결합시키는 문제를 해결한 뛰어난 공로를 인정하여 1918년 노벨화학상을 교수님께 수여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교수님이 처음으로 공업적 해결책을 제공하였고, 농업의 표준과 인류복지를 향상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을 만들어냈습니다. 교수님의 조국과 인류 전체를 위한 값진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프리츠 하버(오른쪽)와 카를 보슈(왼쪽)는 질소를 합성해 암모니아로 대량생산했다. 하버의 별명이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인 이유다. 이로써 인류를 괴롭혔던 맬서스 트랩이 깨졌다.

1917년에는 물리학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초대 소장 후보로는 당시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소속이었던 이론물리학자가 유력하게 떠올랐다. 그는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 창립의 기부자 코펠로부터 13년간 급여를 지원받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물리학연구소의 소장으로도 추천된 것이다. 다만 정부 관계자들은 그의 난해한 이론이 어떻게 산업과 군사력에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는 하르낙이 강조했던, KWG의 정부에 대한 자율성을 잘 보여준다. 물리학연구소장에 취임한 학자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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