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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21. 2024

제1차 세계대전에 동참한 과학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4)

아인슈타인이 과학자로서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보험회사였다. 하지만 가정까지 꾸린 상황에서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과외 알바를 병행했다. 그마저도 얼마 안 돼 실직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일자리는 친구 아빠 찬스로 얻은 특허청 심사관이었다. 연간 특허 수백 건을 검토해야 할 만큼 과중한 업무였다. 그러나 이공계 천재였던 아인슈타인에게는 별일 아니었던 모양이다. 업무 외 자투리 시간에 한 연구에서 물리학의 역사를 바꾸는 성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을 차례로 냈다. 이 성과들은 아이작 뉴턴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진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현대 물리학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후일 노벨물리학상도 이 해에 가장 먼저 발표한 광양자 가설로 받게 된다. 26살의 공무원이 한 방에 이룬 업적치고는 어마어마했는데, 그래서 이 1905년을 기적의 해라 부른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은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물리학의 새로운 슈퍼스타

     

다만 이후의 삶도 녹록하지는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하는 데 근 10년을 소요했고, 그 와중에 불륜을 저질러 아내와 이혼했다. 이때 아내에게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위자료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과학자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힘든 시기였던 셈이다. 이 무렵 아인슈타인의 스카우트에 나선 인물이 베를린대학 총장이자 후일 KWG 회장이 되는 막스 플랑크였다. 플랑크는 1900년 흑체복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화된 에너지라는 가설을 도입했고, 이것이 양자역학의 출발점이 된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도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플랑크도 당시 아인슈타인이 논문을 낸 <물리학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자로서 그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1913년 플랑크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막바지 작업에 매달려 있던 아인슈타인에게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과 베를린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했다.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안 받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기존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베른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플랑크의 호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 설립될 KWG 물리학연구소장으로도 아인슈타인을 천거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황제의 이름을 걸고 만든 국가 연구소의 수장으로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30대의 애송이가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아인슈타인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이지만, 이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성이론은 아직 미완성이었고 노벨상도 못 받았을 때였다. 그럼에도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후일 『막스 플랑크 평전』을 저술한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 하나는 양자역학이고,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물리학연보>에 낸 논문(왼쪽)과 첫째 부인 밀레바 마리치와 찍은 사진(오른쪽). 그는 불세출의 과학자였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1917년 물리학연구소장에 취임(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설립이 계획보다 늦어졌다)한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플랑크의 선견지명을 입증했다. 1918년 <물리학연보>에 제출했던, 일반상대성이론을 체계화한 중력장 방정식이 실험으로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이론을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재구성한 ‘새로운 중력 이론’이라 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근거로 태양 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을 예언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1919년 아서 에딩턴 탐사팀이 개기일식 때 찍은 태양 사진이 근거가 되었다. 이는 영국 왕립학회에 의해 공인되었고, 더 타임스가 보도한 “과학의 혁명 우주의 새 이론, 뉴턴의 생각을 뒤집다.”라는 기사는 아인슈타인을 상징하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의 일이었는데, 독일 과학자의 이론을 적국인 영국에서 실험하고 공인해준 셈이다(역시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1921년에는 노벨물리학상도 받았다. KWG는 설립 10년 만에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다.

     

하버의 독가스 개발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온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이 전쟁은 너나 할 것 없이 제국주의 급행열차에 올라탄 유럽의 필연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군비경쟁과 식민지 쟁탈전으로 온 유럽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빌헬름 2세가 초기부터 추진해온 세계정책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기존 열강들이 독일의 상대가 되었다. 애국주의에 불타는 수많은 독일 국민이 이 전쟁에 지지를 보냈다. 여기에는 좌‧우파 구분도 없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국제주의, 노동자주의를 표방한 이들마저도 이 열강들의 전쟁에 찬성할 정도였다.

     

이제 막 출범한 KWG의 과학자들도 애국주의 광풍에 동참했다. 애초에 KWG라는 연구소가 부국강병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개전 두 달 만에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하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예술작품을 파괴하고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그러자 독일 문화계와 지식인 사회가 나서서 이를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 ‘지식인 93인 성명’에는 첫 번째 노벨물리학상(X선 발견)을 받은 뢴트겐을 필두로, 하르낙, 하버, 빌슈테터, 플랑크 등 KWG의 석학들도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였던 네덜란드의 헨드릭 로런츠는 과학자들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를 비판했다. 그는 동료인 플랑크에게 편지를 보내 부끄러운 줄 알라며, 교수들이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KWG의 가장 큰 기여는 역시 독가스였다. 역설적이지만 그 선봉에는 인공 질소비료를 개발해 인류를 기아에서 구한 하버가 있었다. 개전 초기에 독일군 사령부는 화학무기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하버는 독가스를 써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 넘치는 애국심을 앞세워 군부를 설득했다. 1915년 들어서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참호전의 양상을 보이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에서 당시의 참호전이 생생히 묘사된다. 참호는 허리 높이 정도만 파도 충분한 엄폐가 가능하며, 적군의 기동에는 큰 방해물로 작용한다. 만드는 데 별다른 자재도 필요 없다. 철조망과 기관총만 제대로 갖추면 적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런 참호를 기반으로 한 전투가 특히 보편화되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죄다 참호를 판 결과,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 <1917>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의 양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되자 하버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독가스야말로 참호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획기적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버는 독가스의 주재료로 염소를 제안했다. 염소는 공기보다 무거워서 참호 안으로 스며들어 쉽게 적을 죽였다. 거기다 무기를 부식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하버는 염소가스를 포탄 형태로 만드는 것을 구상했으나, 군부가 탄약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래서 수많은 실린더에서 구름 형태로 가스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폭탄을 제작했다.

      

이 작업은 하버가 소장으로 있던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가 맡았다. 전시에 이 연구소는 아예 육군의 지휘를 받는 산하 조직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500명의 연구소 인력이 밤낮으로 독가스와 방독면을 만들어냈다. 방독면에 들어갈 필터의 제작은 또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인 화학연구소장 빌슈테터가 맡았다. 이렇게 노벨상급의 천재들을 갈아 넣은 덕분에 1916년 1월 독일군에 완벽한 성능의 방독면과 필터가 보급될 수 있었다. 원래 육군의 기술 자문이었던 하버는 화학전 부대 사령관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하사관에서 시작해 몇 년 만에 대위까지 진급했는데, 그만큼 그는 전쟁에 진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사용한 방독면은 노벨상급 천재들을 갈아 넣어서 만든 것으로 완벽한 성능을 자랑했다.


독일군은 1915년 벨기에의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독일군은 넓은 영토와 함께 대포 60문을 탈취했으며, 연합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독가스는 살상 못지않게 적군의 심리적 공포를 부추기는 데도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만 해도 대량살상무기라는 개념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제한 규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99년과 1907년 개최된 헤이그 회담은 모든 종류의 화학‧생물학 무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따라서 독일군의 가스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하버는 “화학무기야말로 전쟁을 단축하고 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수백만 명이 학살되는 것을 막으므로, 오히려 인도주의적”이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독일군에게 ‘선빵’을 얻어맞은 연합군도 독가스를 개발해 실전에 써먹었다. 이렇게 동등하게 장비를 갖추자 독가스는 어느 쪽에게도 이점을 주지 못했고, 양쪽의 희생자는 크게 늘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화학무기로 사망한 군인은 약 9만 명에 이르며, 부상자는 130만 명이 넘는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육군 내부의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 조직 편제(왼쪽)와 독가스 및 방독면 생산 시설(오른쪽)


종전과 개편

     

1918년, KWG의 애국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패전은 독일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했고,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헌법을 채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자 KWG의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제 독일에는 더 이상 ‘카이저 빌헬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화정을 주도한 좌파들이 명칭 변경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하르낙과 플랑크 등 협회의 원로들은 끝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적으로는 공화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군주제와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바로 그해에는 하버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하버-보슈법을 고안한 성과를 인정받아서다. 맬서스 트랩을 깨고 인류를 기아로부터 구해낸 그의 공로는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가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인 동시에, “가스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합국은 하버를 국제법을 위반한 전범으로 규정했다. 그래도 노벨화학상 수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하버-보슈법은 인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성과였고, 하버만 전범으로 취급하기에는 연합국도 독가스를 쓴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18년은 하버에게 조국의 패배와 자신의 영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 복잡한 심경의 한해였을 것이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자 KWG도 운영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막대한 전쟁 배상금 부담에 허덕이면서, 과학 연구에 지원할 자금이 그만큼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 국민은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금 하버의 애국심이 발동했다. 그는 독가스와 방독면 개발에 동원했던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를 재정비해서 바닷물에 용해된 금을 전기화학적으로 추출하는 연구를 계획했다. 그렇게 얻은 금 자원으로 전쟁 배상금을 갚겠다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과학적 해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이공계 천재다운 발상이었다. 한편으로는 IMF 구제금융 시절 우리나라의 ‘금 모으기 운동’도 연상케 한다. 하버의 금 모으기 프로젝트는 이론적으로는 완성되었지만,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금의 양이 너무 적어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30년 하르낙이 사망하자 플랑크가 KWG의 2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KWG는 산하 32개 연구소와 인류사에서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과학자(하버, 아인슈타인 등)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인해 연구자금은 계속 줄어들었고,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했다는 비난 또한 받고 있었다. 72세의 노학자 플랑크는 이렇듯 쉽지 않은 시기에 이 거대한 연구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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