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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28. 2024

나치 시대와 암흑기

독일 막스 플랑크 협회 (5)

1930년대는 KWG는 물론 독일에도 전환기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의 경제난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정부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갚고 경기를 부양하고자 화폐 발행량을 크게 늘렸다. 마르크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인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자충수가 되었다. 통화량 급증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돈의 가치가 폭락했고, 투자 위축과 기업 부도로 이어져 실업이 만연했다. 이는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참여했던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예상한 대로였다. 케인스는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독일을 혼란에 몰아넣고, 평화에도 위협이 될 거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케인스가 예상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빈곤과 혼란으로 인해 극단적 정치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듯 이 예상도 맞았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이하 나치)의 등장이다. 플랑크가 KWG 2대 회장직을 맡은 1930년, 나치도 원내 2당으로 부상했다. 플랑크는 대중에 대한 학문의 우위를 믿었던 귀족적 엘리트주의자였다.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무지한 자들이 주권을 갖는 한심한 체제로 여겼다. 이런 그였기에 대중 선동을 일삼는 나치를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히틀러처럼 인생에서 수차례 실패한 인간이 정치적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와 독일 물리학

     

하지만 그것은 플랑크의 착각이었다. 1933년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는 총통에 올라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독일 국민은 열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4년에 걸친 경제난을 해결하고 독일인의 자존심을 세워주리란 기대 때문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빠르게 경제부흥을 이뤄냈다. 6백만 명에 달하던 실업자는 6년 뒤 몇만 명으로 줄었다. 아우토반 건설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의 추진과 대기업에 막대한 혜택을 부여한 효과가 났다. 이로써 독일은 인플레이션을 극복함은 물론,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전쟁 수행의 물적 기반도 갖추기 시작했다.

아우토반(고속도로) 건설은 경기 부양을 위해 나치가 추진한 대규모 공공사업이었다.


나치 통치의 다른 한 축은 반유대주의였다. 유대인을 혐오하는 정서는 유럽에서 뿌리가 깊었다. 나치는 초기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이에 편승했고, 유대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해왔다. 이것이 집권과 함께 합법적, 공개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아리아인이야말로 인류 발전에 기여해온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 본래 아리아는 ‘귀족적인 것’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 이것이 학문적 의미에서 벗어나서 ‘백인종’으로 과격하게 오용되었다. 반면 유대인은 그와 대립하는 하급 인종으로서 추방해야 할 존재라고 규정되었다. 나치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유대인에 대한 분노로 돌리고, 독일적 가치를 중심으로 국민을 단결시키고자 했다. 유대인에 대한 인종말살정책은 그 필연적 결과였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과학에도 혼란과 갈등을 일으켰다. 유대인 과학자들이 이룬 성과를 부정하고 그들의 지위를 빼앗는 사태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꼽혔던 아인슈타인이다. 상대성이론이 1919년 실험으로 입증되고, 1921년 아인슈타인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자, 일간지와 잡지들도 아인슈타인을 대서특필했다.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인도 알 만큼 아인슈타인은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러자 반유대주의 성향의 과학자들이 저격에 나섰다.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유대인 물리학이라 비판하며, 대안으로 순수한 독일 물리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순수한’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독일 정신사에 전해 내려오는, 독일적 미덕을 체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히틀러의 뮤즈 리하르트 바그너가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그려낸 것처럼 말이다.

      

필리프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가 이러한 순수 독일 물리학의 선봉에 섰다. 이 두 노벨상 수상자가 제창한 독일 물리학의 골자는 이러했다.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 문제와 밀착해야 하고, 산업에 이득이 되어 국가의 경제적 자족성에 봉사하는 것. 이 기준에 따르면 상대성이론은 국가의 부강함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사변적인 학문일 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두 선배의 비난에 실망해서, 그리고 살해 위협을 피해서 해외로 나갔다. 플랑크는 자신이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가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을 보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레나르트(오른쪽)가 쓴 『독일 물리학』(왼쪽)은 반유대주의에 편승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난했다.



     

독일을 떠나는 과학자들

     

1933년 4월 나치는 <직업공무원제도 재건법>을 제정했다. 한 마디로 유대인은 독일의 공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특히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대학과 KWG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플랑크는 KWG 회장으로서 이에 반대했으나 소용없었다. KWG는 126명의 직원을 해고해야 했고, 그중 104명이 과학자였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미국에서 강연 여행 중이었다. 미국에서 <직업공무원제도 재건법> 제정 소식을 접한 아인슈타인은 두 번 다시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고, 나치는 그의 오두막을 허물고 히틀러 청소년단의 캠프로 개조했다. 벨기에, 영국을 떠돌며 난민으로 지내던 아인슈타인에게 유럽의 여러 대학이 교수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미국이었고, 193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정착했다. 또 한 명의 유대인 과학자인 존 폰 노이만도 이 무렵 프린스턴으로 이주했다.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첫 테뉴어 교수로 기록된다. 1930년 뉴저지의 한 백화점을 매각해서 지어진 이 연구소는 이때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KWG를 떠나야 했던 인물 중에는 하버도 있었다. 하버가 누구인가. KWG의 초대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장이자, 인류를 기아에서 구한 노벨상 수상자이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불타는 애국심을 입증한 열혈 독일인이 아닌가. 그런 그도 유대 혈통이라는 숙명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플랑크는 어떻게든 하버만큼은 지키고자 했다. 플랑크와 하버는 1918년에 함께 노벨상(물리학상, 화학상)을 받았으며, 20세기 초반 독일 과학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플랑크는 KWG 회장 이전에 한 명의 과학자로서 하버를 존경했다. 동료들도 하버의 사직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쓴 참이었다. 플랑크는 히틀러와 만나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유대인 중에서도 뛰어난 독일문화를 자랑하는 오래된 가문도 있으니, 차별을 두자.”는 논리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답은 간단했다. “그래봤자 유대인은 유대인일 뿐.”


결국 하버는 KWG를 사직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갔다. 하지만 왕립학회장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전범이라고 무시당하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건강도 악화되었다. 그러다 이스라엘로부터 새로 설립하는 시프연구소의 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를 수락한 하버는 이스라엘로 떠났으나, 중간에 스위스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인류사 역대급을 다투는 천재의 죽음치고는 쓸쓸한 것이었다. 또한 누구보다 사랑했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죽음이기도 했다. 평생에 걸친 하버의 독일 사랑은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나버렸다. 다만 그가 소장을 지낸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는 1953년 MPG로 편입되면서 ‘프리츠 하버 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연구분야가 아닌 사람 이름을 명칭에 쓰고 있는 MPG 산하 연구소다.

1921년 KWG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현 프리츠 하버 연구소)에 모인 과학자들. 아인슈타인, 프랑크, 하버 등이 보인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나치 집권 뒤 연구소를 떠나게 된다.



     

역사의 인과응보

     

아인슈타인과 하버 외에도 많은 과학자가 독일을 떠났다. 그중에는 양자역학의 기수 괴팅겐 학파도 있었다. 막스 보른, 제임스 프랑크, 엔리코 페르미(아내가 유대인이었다), 에드워드 텔러 등 괴팅겐대학 출신 학자들이다. 넓게 보면 박사과정에서 보른을 사사했던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도 포함된다. 실제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에 괴팅겐 시절이 잠깐 나온다. 원래 케임브리지대학에 있던 오펜하이머는 닐스 보어의 충고로 보른에게 가서 양자역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런데 레나르트와 슈타르크는 상대성이론뿐만 아니라 양자역학도 유대인 물리학으로 간주했다. 당시 괴팅겐대학은 양자역학의 요람이자 첨단 물리학의 핫플레이스였다. 양자가설을 도입한 플랑크는 물론, ‘양자역학’이라는 용어를 창안한 보른도 괴팅겐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이러한 새로운 학문의 출현에 주목한 많은 인재가 괴팅겐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 때문에 이들은 영국, 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이후 양자역학의 중심지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옮겨갔다.

     

물론 모든 과학자가 다 나치에 협력하거나 해외로 떠난 것은 아니다. 괴팅겐 학파의 막내 격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순수 독일인이라 국내에 남았다. 그리고 고작 31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나치는 이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협조하지 않자, 나치는 그를 아인슈타인의 잔당으로 취급했다. 마침 그의 전공도 양자역학이었으니 빌미도 충분했다.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입장을 바꿔 나치에 협력했고, 이후 핵 개발 프로그램까지 총괄하게 된다. 막스 폰 라우에는 훨씬 강경하게 나치에 맞선 경우다. 플랑크의 제자였던 그는 19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의 부소장으로서 KWG 물리학연구소를 이끌었다. 나치 시대에 라우에는 뛰어난 두뇌들이 독일을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에 대한 탄압을 17세기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에 비유하며 독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끝까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 종전 뒤에는 MPG의 프리츠 하버 연구소장을 맡아 독일의 물리학을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나치 시대에 벌어진 일들은 정치가 과학을 식민화하면 생기는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플랑크는 KWG 회장이자 존경받는 원로로서 이 사태를 최대한 막고자 했다.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처음부터 나치의 이념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국민의 정신세계까지 장악하는 파시즘의 시대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플랑크는 전임자 하르낙이 만든 연구자 자율 원칙이 무너지고, 연구현장이 인종주의의 시험장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역대 회장 중 가장 뛰어난 학자였던 그의 재임기가 곧 KWG의 암흑기가 되는 역설이 펼쳐졌다.

1928년의 아인슈타인(왼쪽 두 번째), 플랑크(세 번째), 폰 라우에(다섯 번째). 플랑크는 존경받는 석학이었지만, 역설적으로 KWG의 암흑기에 재임한 회장이었다.

      

그 후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한때 세계를 선도했던 독일의 물리학은 끝없이 추락했다. 독일은 1901년부터 1932년까지 11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나, 나치 집권기에 이 숫자는 0이 되었다. 독일은 나치가 패망하고도 9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노벨상보다 더욱 현실적인 위협이 드러났다. 나치에 의해 쫓겨난 과학자들이 미국에서 재회해 맨해튼 계획에 동참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계획을 착수시켰고, 프랑크, 페르미, 텔러, 폰 노이만, 오펜하이머 등은 단 3년 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물론 나치가 그전에 패망해서 이 폭탄은 일본으로 향했지만, 항복이 늦었다면 꼼짝없이 독일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의 인과응보, 역사의 복수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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