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하고 다신 여행 안가!!
하노이에서 쌀국수를 못 먹을 수도 있다.
주로 나는 친구와 여행을 다닌다.
주변 사람들은 그중에서 특히나 아빠는 친구랑만 여행 다니고 남편 하곤 안 간다며
못마땅해했다.
남편과의 여행은 결혼 20년이 넘도록 다섯 손가락을 다 접지 않아도 될 정도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휴가를 길게 뺄 수 없다는 남편을 설득시켜서 함께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우린 서로 여행 취향이 다르다.
남편은 관광. 나는 휴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여행을 같이 해야 하는-이건 나의 주장이다- 이유가 생겼다.
결혼 20주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0주년이라니 징그럽게 오래도 살았다.
한 사람과 어떻게 평생을 사냐고 했던 나는 20대가 저물 무렵 30대 중반의 남편을 만났고
중늙은이라며 엄마가 반대했지만 우린 결혼이란 걸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딱 떨어지는 해는 기념해야 한다.
10년 20년... 이벤트 하기 좋은 숫자가 아닌가.
난 유난히 이벤트에 목숨을 건다.
뭐가 됐던 특별한 날로 만드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듯하다.
그래서 준비한 결혼 20주년 이벤트 중 하나는 리마인드 웨딩이었고
결혼기념일 즈음하여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거였다.
우리의 여행지는 하노이와 하이퐁이었다.
여행 일정은 물론이거니와 항공권 구매부터 호텔두곳과 하이퐁에서 1박을 할 크루즈선 예약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남편에게 맡기느니 내가 알아보는 게 속편 하다.
완벽했다.(물론 이것도 내 생각이다.)
맥주 거리를 초근접 거리에 둔 첫 번째 호텔은 가성비도 좋을 뿐 아니라
그토록 가고 싶었던 맥주 거리에서 버터에 담그다시피 해서 구운 바케트(튀긴 바케트가 맞을지도)를 드디어 맛보게 해 주었다.
하이퐁의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비스며 투어며 음식 뭐하나 뺄 것 없이 좋았다.
특히나 우리를 담당했던 크루즈 직원은 결혼기념일인걸 알고 따로 카드마술까지 보여줬다.
이제는 사라진 하노이 기찻길에서는 마치 이벤트처럼 꼬꼬마 의자에 앉자마자
기차가 지나가 주시는 행운도 가져다주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들어갔던 박물관도 맘에 들어했고,
알아보지도 않고 받았지만 엄지 척하게 만든 마사지샵도 남편은 만족스러워했다.
그 때문인지 왕골 가방 하나를 사기 위해 가게를 찾아 두 시간을 헤매는데도 참고 견디어 주었다.
택시기사가 바가지 씌우려 했을 때는
어눌하지만 당당한 콩글리쉬로 대처해주었다.
그렇게 이번 여행만큼은 둘이 큰 문제없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다.
물론 내가 휴양을 포기했기 때문이긴 했지만 나 역시 여러모로 좋았던 여행이었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평소 비위가 약한 남편이 길거리 음식을 먹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더군다나 베트남에 대한 남편의 선입견은 먹어보지도 않고 고개부터 젓는다.
그 유명한 오바마 분짜에 가서도 젓가락으로 면만 몇 가닥 먹다 말았다.
여긴 괜찮다고 깔끔한 데라고 해봤자 소용없을 일이다.
그러다 보니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제쳐놓고 호텔이나 깔끔한 레스토랑만 검색해가며
다녀야 했다. 맛이 없어서도 안되고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도 안되고.
마음 같아선 남편을 맥도널드에 앉혀두고 나 혼자 로컬 맛집을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쩌랴 그래도 결혼기념일 여행이지 않은가.
그것도 무려 20주년.
터질 지뢰는 언젠간 터진다.
우리의 지뢰는 쌀 국숫집에서 터졌다.
백 파더가 모 방송에서 극찬을 했던 쌀국수 맛을 보고 싶어 어떻게든 남편을 꼬셔서 데려가는 데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그냥 돌아서야 했다.
남편이 식당이 더러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게의 위생상태는 사실 내가 봐도 좋진 않았다.
왜 그런지 오기가 생겼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로컬이 다 그렇지. 그렇게 선입견을 갖고 있으니 문제야.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잖아. 너무 한 거 아냐?
"당신하고 다신 여행 안 가!!"
전 날 더위에 지쳐 맥주 마시러 나가자고 했을 때 TV 축구 중계를 보던 남편도 참아내던 내가
쌀국수에서 무너진 것이다.
미안하다며 너라도 먹으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음은 상할 대로 상했고 이후로 남편의 모든 행동은 눈엣가시처럼 맘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20주년 결혼 기념 여행은 약하디 약한 남편의 비위와 나의 찌질함의 합작으로 끝이 났다.
여행은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여행은 입맛이 맞는 사람과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지에서 로컬 음식을 먹는 게 내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임을 숨기지 않겠다.
가족이 모두 현지 음식을 못 먹어서 늘 맥도널드에서 끼니를 해결했다는 친구는 로컬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만 포기했다고 한다.
십 년 뒤 남편은 비위가 좀 좋아지려나.
나의 못된 성질머리는 좀 누그러지려나.
30주년 결혼기념일에는 해외는 가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