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의 감정을 지배해선 안 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경우가 있다. 혹시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늘 자책한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정작 친구들에겐 연인의 행동을 변명하기 급급하다. 상대의 질책을 피하려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더는 혼자 결정하는 일이 힘들어지고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혹시 당신의 이야기라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요즘 심심치 않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가스라이팅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만큼 사례도 많다. 유명인 누가 연인 누구를 조정했다, 가스라이팅 했다는 뉴스도 보도되는 걸 보면 감정 폭력이 얼마나 많이 일상에서 자행되는지 알 수 있다.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어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피해자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병리적 심리 현상이다.
작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이 1938년에 연출한 스릴러 연극 『Gaslight』에서 유래한 말로 ‘가스등 이펙트’라고 불리기도 하는 심리적 조작 수법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흑백영화 『가스등』에서 주인공 벨라는 잭과 결혼하는데 잭은 보석을 훔치기 위해 이웃집 여인을 살해 한 사람이다. 잭은 숨겨진 보석을 찾기 위해 살해한 부인의 집에 들어가 가스등을 켜고 보석을 찾기 시작한다. 가스등을 켜면 나눠 쓴 다른 집의 등은 어두워진다. 벨라는 남편이 외출할 때마다 등이 어두워지고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잭은 벨라에게 자신의 행동이 들킬 것이 두려워 벨라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간다. 벨라는 점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무기력함과 공포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더 의지하게 되고 자아를 잃고 망가지게 된다.
가스라이팅은 보통 연인 사이에서 많이 생기지만, 가족 혹은 직장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가해자의 조정으로 인해 스스로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판단 능력과 현실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은 심리적 폭력이자 학대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감정을 하찮게 취급하며 행동을 문제 삼기도 한다. 또한, 피해자의 기억을 부정하고 말을 못 알아듣는 척 시치미를 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왜 그때 얘기하지 인제 와서 그러는 거야?”
“네가 그깟 일로 이 정도로 힘들어할 줄 몰랐네.”
“그나마 나나 되니까 네 얘기도 들어주는 거야”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분명 너도 그때 좋다고 했었거든. 너 점점 예민하게 구는 거 알지?”
그 사이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가해자가 늘 거칠고 억압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능숙하게 ‘다정하고 매력적인 사람’을 연기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결과는 피해자의 기대와는 다르다. 가해자들은 본인이 내킬 때만 다정한 태도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특별한 관심’을 표현하고, 정작 피해자가 필요로 할 땐 모른 척 외면하거나 짜증을 낸다. 피해자는 “나는 이렇게 자상한 사람을 왜 화나게 하는 걸까?”라며 자책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사람들은 얼마나 멍청하면 감정을 조정한다고 그렇게 쉽게 당하냐고 하거나 피해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니 그런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 연인뿐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를 아끼고 사랑하는 피해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심리를 조정해서 그럴 리 없다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수렁에 빠졌을 뿐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좋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피해자가 한 명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장점과 인간다움에 타격을 입어서는 안 된다.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그 누구보다 멋진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가스라이팅의 가해자는 피해자의 삶을 조정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자존감과 자신감을 빼앗아 홀로서기 힘든 상태로 만든 뒤 모든 것을 조정하며 감정을 착취한다. 그야말로 감정 뱀파이어가 따로 없다. 어이없지만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조정자 역시 열등감의 소유자일 확률이 높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해 자신의 무력감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타인을 깎아내리고 자존감을 뭉개면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는 사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내가 더 잘하면 괜찮지 않을까?’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 내가 좀 참고 지나면 좋아지겠지’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더군다나 당신의 감정을 조절해서 피폐하게 만든 사람과 대화로 풀어낼 생각은 애당초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 당신은 대화에서 또 그들의 게임에 휘말리게 될 것이고 결국 다시 그 늪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주변 사람에게 맞춰주고 베푸는 것이 좋은 당신이라면 그래서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상대를 위해 기꺼이 비난도 감수하는 착한 당신이라면 특히나 가스라이팅의 타깃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옳다고 믿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정당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가스라이팅이 존재하는 관계는 결코 사랑이 아님을 기억하자.
감정은 개인의 소중한 자산이며 인생에서 모든 선택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산다는 건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 무던히 애써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 조정당하지 않도록. 선을 넘는 사람에게 단호해야 하는 것은 미안함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의무이며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