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한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바꿔말하면 주변의 눈치를 봐가며 욕먹을 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의 의견을 말함으로써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에 생겨난 말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신의 의견과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주변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부의금을 얼마를 해야 하는 거야? 근데 시어머니 부의금까지 해야 하는 거야?”
지인의 시어머니 부고 소식에 다급하게 친구가 물었다.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럽다. 경조사비를 내는 것은 본인의 상황에 맞게 결정하면 될 일이다. 나와 상대방의 관계가 친구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에도 그런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는 본인도 답답하다.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자신도 따라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속마음은 굳이 시어머니 부의금까지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만 안 하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욕먹기 싫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냥 조용히 남들처럼 살면 될 일을 욕까지 먹어가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혹시 이기적으로 보지 않을지 걱정되고 나만 따돌림당할까 두렵다. 자연스레 원치 않아도 경조사비를 내고, 중국집에선 남들 눈치를 보며 먹고 싶지 않은 짜장면을 시킨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러면서 ‘좋은 게 좋은 거니까’라고 안도한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하고 남들과 다른 선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정적 추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막연한 감정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부의금을 내지 않으면 분명 나를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볼 거야.”
“다들 짜장면을 시키는데 나만 볶음밥을 시키면 이기적이라고 하겠지.”
“죄책감이 드는 거 보니 잘못된 행동인가 봐.”
그저 주관적이고 빈약한 정보에 의한 추론일 뿐인데도 자주 이런 결론을 내리고 정작 하고 싶은 말에는 입을 닫는다. 그런 자신이 때론 한심하기까지 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자책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 행동에 가깝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위안으로 남들을 따라 하기 급급하다 보면 정작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두려워져 숨기게 된다.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타인 눈치를 보며 갈등 상황을 피하고 매번 순종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경조사비까지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어보는 상황은 이미 자신의 느낌, 감정, 욕구를 억누르고 무시하고 있다는 결과다. ‘나는 이미 부모님 다 돌아가셔서 나중에 돌려받지도 못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등 떠밀려 억지로 지갑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에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친구가 그랬다.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며 우울해했다. 무기력하게 자신을 숨기는 어른은 아무리 착한 사람으로 포장해도 진정한 어른이 아니다.
과연 우리가 타인을 따라 적당히 맞추는 것이 미덕일까?
감정적 추리가 위험한 것은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짜장면을 시킨 것은 함께 식사하는 다른 이들의 행동을 암묵적인 강요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같은 선택을 했다 해도 그것이 강요라고 말할 수 없다. 실상 강요하거나 합의를 종용한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객관적인 현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충분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해석한 것뿐이다.
물론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암묵적 기대나 요구에 순응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자신과 타인의 적절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요구할 것이 있으면 적당히 요구하고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건강한 어른이 되고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욕먹어서 좋은 사람은 없다. 그렇더라도 혹시 나 없는 자리에서 욕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는 건 우습지 않겠나. 욕 좀 먹으면 어떻고 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자유일 뿐이다.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욕심이다. 실제로 크게 잘못한 게 아니라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욕구는 뒤로한 채 주변의 상황에 전전긍긍하다 보면 자신을 잃게 된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데 스스로 암묵적인 합의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결국 자신이 만든 올무에 발목을 저당 잡히는 꼴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의 욕구와 선택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에게 휘둘려 분위기에 휩쓸리다 자신이 원하는 선택이 아닌 순간, 피해 의식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된 것이라고. 다들 그러는데 나만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고. 은근히 내게 강요했다고.
이제 그만 좀 하자.
S는 얼마 전 친구 시어머니 부고에 위로의 문자는 했지만, 부의금은 생략했다. S는 친구 친부모의 부의금까지만 낸다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S는 비혼주의자다. 시댁 식구를 만들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친구의 시댁까진 챙기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았다. S가 부의금을 보내지 않았다고 이러쿵저러쿵 한 친구는 없었다. 모임에서 제외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 억지스럽게 남들에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 S의 성향을 친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정작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변이 아니라 자신이다. 내가 변해야 주변 상황도 변한다. 상황이 나를 만든다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결정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인생의 모든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으며 문제가 생겨도 책임 역시 자신에게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란 말은 그 ‘좋은 것’이 ‘나’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구 좋아하라고 이토록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지 생각하면 어느새 깨닫게 된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적군에 가담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과 같다.”
-알렉산드로 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