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집을 짓자는 모의를 시작할 무렵, 제부들을 설득할 좋은 방법으로 선택했던 아이템이다. 골프를 시작한 지 오래됐는데 최근 다시 빠져든 제부 S와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부 K와 D. 그 중 K는 막 재미를 붙였고, D는 원하는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해하는 상황. 집을 지어서 스크린 골프장을 한 켠에 마련해 주면 다들 좋아할 거라는 철저한 계산이 있었다.
완전 꽂힌 사람은 제부 S다. 설계 미팅 전부터 인터넷 검색으로 스크린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두었다. 얼마의 면적과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도. 건물 어디쯤 그 공간을 마련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완전 즐거운 고민! 비용은 자신이 대고 다른 제부들에게 사용료를 받을 거라는 원대한 계획까지 세우며 들떠 있었다.
그런데 설계 시작도 전에 가장 큰 그 로망이 깨져 버렸다. 네 가족이 살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용적률 맞추기에 빠듯했고(사실은 조금 부족^^), 알고 보니 스크린 골프장은 제부가 찾은 정보보다 훨씬 더 큰 공간을 필요로 했다. 제부 S와 K의 실망이 너무 커서 살짝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이러다 집 짓고 같이 사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거 아냐?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까지 벌어지진 않았다. 어쩌겠어. 이미 땅도 사버린 걸. 미리 확 저질러버리길 참 잘했다!
설계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자 우리들의 로망은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나타났다.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꼭꼭 숨겨두었던(혹은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던) 로망이 있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아주 많이!
실현 가능한 로망이야 되도록 잘 적용하면 되는 일이지만 특히 이런 로망들은 무언가 의견 취합이 다 된 후에 어김없이 ‘딴지’ 같은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았다는 게 문제다. 그 로망들 어떤 것은 적절히 반영하고, 어떤 것은 철저히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게 현실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로망 중에서도 셋째네 부부의 로망은 좀 골치 아팠다. 셋째의 남편 D의 가장 큰 로망은 널찍한 거실. 그동안 25평 아파트에서 아이 둘 낳고 10년 남짓 사는 동안 ‘넓은 거실’을 노래부르며 34평으로 갈아탈 마음이 간절했던 터다. 셋째도 넓은 거실이 탐나긴 했지만 더 큰 로망은 ‘다락방’에 있었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를 보며 소녀들이 꿈꾸던 다락방. 그 다락방을 선택하고 싶은데 두 가구가 쪼개서 써야 하는 4층에 넓은 거실은 나올 수가 없는 상황. 사실 셋째는 남편의 로망을 실현해주고 싶은 마음과 본인과 딸을 위한 다락방 사이에서 자기 안의 갈등이 심했다.
아들 방의 벙커침대 시스템, 딸 방의 드레스 룸, 화장실의 사우나 시설 등 자잘한 것들도 여럿 있었지만 설계와 시공이 진행되면서 변한 것도 많다.
넷째네의 로망은 거실의 높은 층고와 실링팬, 널찍한 화장실에 3인용 이상의 조적 욕조를 넣는 것이다. 넷째의 로망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제부 S의 로망이었는데, 초등학생 아들 둘과 함께 물놀이 하며 목욕할 꿈에 부풀었다. 20년 넘은 복도식 아파트 20평대에 오래 살아서 늘 부족한 공간에 허덕였기에 넓은 거실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또 하나 제부의 특별한 ‘로망’은 창고. 이건 개인적 로망이라기보다는 업무상 필요한 것이다. 업무 특성상 개인 창고가 필요해 지금은 따로 임대해서 쓰고 있었기에 건물 어딘가에 충분한 크기의 창고가 있었으면 했다. 만족스러운 크기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창고로 사용할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되긴 했다.
아일랜드를 설치한 대면형 주방을 만드는 것도 넷째네의 로망에 포함되었는데, 주방 형태를 누구의 뜻대로 하느냐를 가지고 한참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공원뷰 거실에는 별 욕심을 안 부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넷째가 잠깐 공원뷰가 없는 것을 고민하니 제부가 말했다. “평생 거실 밖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뭘!”
다락방과 벽난로. 우리들의 로망은 모두 어린 시절 동화 속 어딘가에서 데려왔을지도 모르겠다.
막내네는 결혼생활이 가장 짧은데도 그동안 가장 여러 종류의 집을 거쳤다. 충무로의 낡고 좁은 신혼집, 신당동 엄청난 비탈의 복도식 아파트, 일산의 40평대 넓은 아파트 월세를 거쳐 2년 전 김포의 타운하우스를 분양받기까지 면적이나 연식 모두 극과 극을 달리는 경험을 해왔다. 산전수전 다 겪고 꽤 좋은 집에도 살아봐서인지 그들은 가장 평범한 집을 원했다.
제부의 로망 한 가지는 ‘벽난로’. 그것도 꼭 장작을 태워 열을 내는 화목난로. 늘 전원주택을 꿈꿨던 부부는 타운하우스 들어가게 되면서 다른 것들은 대부분 실현했는데 결국 실내에 벽난로를 놓지는 못했다. 우리가 짓는 패시브 하우스의 특성상 난로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결코 그들이 포기하지 못한 아이템이다. 그러고 보니 한냉알러지가 있다는 막내제부 K는 펜션 여행 가서도 밤새 거실 벽난로 안에 장작을 넣고 있었던 것 같다.
아, 막내네는 ‘운동실’도 계획했다. 나중에 구조를 보고 다들 갸웃했지만(심지어 건축가도 다른 대안을 제시해 줌) 그들은 안방 옆에 벽을 세우고 ‘운동방’을 넣고야 말았다.
우리 가족의 로망은?
설계를 시작할 무렵 질풍노도의 중2를 겪어내고 있던 아이는 딱 지금의 방 크기보다 작지 않은 자기 방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하나 더하자면 좋은 게이밍 컴퓨터? 신랑은 뭐든 상관없다고 했다(그렇다고 이게 다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비교적 계획이 수월하긴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나도 꼭 갖고 싶은 게 있었다.
잘 꾸며진 홈 카페와 글 쓰고 책 읽을 내 작업실. 그게 다락이면 참 좋겠다고 처음 집을 지을 꿈을 꾸면서부터 생각해왔었다.
또 하나 엄마 아빠가 언제든 와서 충분히 쉬다 갈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 네 자매의 집과 따로 하나 마련하면 더 좋고 안 되면 우리집에 방 하나를 충분한 크기로 만들었으면 했다.
그 모든 게 쉽지 않았다. 일을 진행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고, 실망하다 낙담하다 또 괜찮다를 반복하는 나를 곁에서 지켜보며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물었다.
“무슨 로망이 그렇게들 많냐? 같이 모여 살고 싶은 게 가장 큰 로망 아니었어?”
남편의 그 말 한 마디가 내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나의 진짜 로망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내가 말하던 ‘우리들의 로망’ 뒤에 숨겨진 사심이 얼마나 많았던 걸까.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심을 잃기 때문이리라. 그래, 애초 나의 가장 큰 로망은 우리 자매들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맞다.
게다가 난 길게 공원쪽으로 열린 주방과 거실 어디든 내가 좋아하는 테이블과 노트북을 올려놓고 맘껏 커피를 마시며 글 쓰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다. 아이가 ‘로망’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에게 뾰족한 세모 지붕의 넓은 다락방을 통째로 줄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시큰둥 하지만 아이도 어쩌면 거기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잊고 있었는데, 형제 없이 크는 아이에게 한 지붕 밑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게 해주겠다는 것도 나의 ‘로망’이었구나!
우리들의 ‘로망’은 아마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한동안 로망의 ‘로’자도 듣기 싫었는데 이렇게 정리하다 보니 이젠 좀 가볍게 느껴진다.
우리가 집을 지으며 각자 딱 하나의 ‘로망’만 실현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다음 자매 회의 주제로 삼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