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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쟁이 Dec 17. 2020

3. 우리들의 지난한 동거 기억들

- 할머니방과 서울 어느 낯선 동네에서의 조우

우리는 다섯 자매다. 아들 하나도 없이 온전하게(!) 딸만 다섯.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아빠는 종손이기까지 했다. 애초 "아이는 둘만 낳자"는 아빠의 제안을 엄마는 수락할 수 없었다. 딸딸딸 계속 낳는 동안 아무도 아빠 탓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은근히 혹은 대놓고 한 소리 하는 친인척, 동네 할머니들에게 그 대상은 늘 엄마 혹은 우리들이었으니까.

"아이고 이집 딸들은 하나같이 똘똘하네. 쯔쯧, 고추만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우리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동네 할머니께 나 역시 대놓고 "딸이 뭐 어때서요?" 당돌하게 맞받아쳤지만 늘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는 일곱, 여덟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다섯 자매에서 끝냈다! 그 후로도 엄마는 내가 다 알지 못할 힘든 시간들을 무던히도 견뎌냈겠지만 우리 다섯 자매는 똘똘 뭉쳐 동네에서 어떤 남자애들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독수리오자매'로 한덩어리처럼 지냈다.


언니, 나, 동생 셋까지 다섯 자매. 두세 살 터울의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다 동생이 태어나면 할머니 방으로 옮겨갔다. 언니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 먼저 할머니 방으로 보내졌다. 나는 셋째가 태어나자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 언니와 합류했다. 넷째가 태어나자 셋째까지 할머니 방으로 가다보니 할머니 방은 어느 새 부모님 방보다 더 북적이는 공간이 되었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는 아마도 부모님 방에서 네 살 넷째가 같이 지내지 않았나 싶다.

열살 남짓 무렵 잘 때마다 이불을 걷어차고 웃목으로 자꾸 기어올라가는 우리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우리의 궁딩이를 팡팡 치곤 하던 할머니가 기억난다. "아이고, 얌전히들 좀 자라" 꿈결인 듯 들리던 그 목소리. 꿈결인 듯 아프지 않던 그 팡팡 맞던 엉덩이의 감촉. 지금도 가끔 그 시절 한 이불 속에 옹기종기 모여 서로 이불을 끌어당기던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지곤 한다.

응답하라 1985. 순서대로 선 다섯 자매. 고향집 근처 사는 언니만 빼고 네 자매가 모여서 집을 짓기로  했다.

자라면서 언제부턴가 그런 얘길 했었다.

"우리 커서 5층으로 집 지어 한 층씩 살자!"고.

별로 소질 없는 그림 실력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집을 그리기도 했었다. '언젠가'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도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그냥 막연히 커서 돈을 벌면 함께 집을 짓고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도 저 사진처럼 순서대로 살 생각이었는지, "나는 3층!, 나는 꼭대기층!" 주장을 했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이번에 집을 짓게 되면서 처음으로 우린 서로의 취향을 제대로 알아가게 됐다.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었지만, 어떤 것들은 참 의외인 면들도 있었다. 그동안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많았던 탓이리라. 하나같이 옥탑의 다락방을 갖고 싶은 우리 모두의 마음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던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 대한 오래된 로망이 아니었을까.


언니만 빼고 네 자매가 집을 짓기로 결정했을 때 언니는 동시에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나만 왕따네." "근데,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딱 언니다운 모습! 오랫동안 유치원생들을 가르쳐온 사람 답게 언제나 천진난만한 우리집 장녀다. 고향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후 첫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거기서 결혼하고 쭉 유치원 교사로 살아온 지 어언 25년도 넘었나보다. 언니와 나의 서울행은 안타깝게 엇갈렸다. 어쩌면 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1년을 외삼촌집과 당숙집에 얹혀 살던 언니는 내가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 함께 지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아 공주의 국립대학에 진학을 했고, 언니는 혼자 자취를 하거나 고향으로 내려오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혼자 자취할 만한 월급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양쪽으로 살림을 내줘야 하는 부모님의 부담도 컸을 것이고, 대학생 하나에 고등학생, 중학생 줄줄이 늘어선 딸들의 교육비를 감당하기도 힘겨웠을 것이다.

언제까지 당숙집에서 언니가 회사를 다녔는지 모르지만 결국 언니는 홀로서기를 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언니가 내려가 유치원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까지 하고 나자 셋째가 대학에 입학해서 나와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와 셋째는 쭉 함께 살면서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


우리가 서울에 자리잡은 건 대학을 졸업하면서다. 셋째는 취업을 하고 나는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봉천동 언덕배기 다가구주택에 처음 한 칸짜리 전셋방을 얻었다. 딱 1년을 둘이 살고 넷째가 대학진학을 하면서 합류했다. 셋이 1년 살고나자 곧바로 집 없는 설움을 겪어야했다. 무조건 올려줘여 하는 전셋값을 피해 이사를 택했다. 서울 지리가 훤해지도록 발품을 팔아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 성내역 잠실시영아파트에 두 번째 서울집을 얻었다.

이번에 집을 짓고 함께 살기로 한 네 자매가 모두 모여 산 곳이 바로 그 시영아파트다. 너무 낡아 칠이 다 벗겨진 13평짜리 아파트에 들어가고 2년 후 대학 진학하는 막내까지 합류했다. 그게 대망의 2000년이다. 밀레니엄으로 떠들썩했던 그 해, 00학번이라는 낯선 숫자에 신기해하며 막 스무살이 된 막내부터 서른을 코앞에 둔 나까지 넷이 요란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인 둘 대학생 둘로 시작한 네 사람의 동거는 2002년 네 자매와 네 자매의 지인들까지 더욱 요란한 월드컵 맞이를 함께했다. 지금 제부가 된 넷째와 막내의 남자친구들도 이미 그때부터 함께였다. 그러고보니 두 제부를 만난 때가 남편을 만난 때보다 훨씬 전이었구나. 그들은 나와 월드컵 응원을 함께 했던 사이였구나. 되짚어보니 참 새삼스럽다.

네 사람의 동거는 딱 3년으로 막을 내렸다. 막내가 월드컵으로 들끓던 그 해 재수를 하고 지방의 한 의대에 합격하면서 떠났다. 남은 세 사람의 동거는 시영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근처 삼전동 다세대주택으로 옮겨가서 조금 더 지속되었다. 몇 년 후 한 해에 둘이 결혼을 하면서 한 해에 우린 모두 이별을 맞았다. 봄에 셋째가 결혼할 때는 나와 넷째가 남아 둘이 함께 살았지만 겨울에 나까지 결혼하면서 완전히 따로가 된 것이다. 2005년 겨울, 그게 벌써 15년 전이다.

아직도 가끔 집 정리를 하다보면 동생의 책이 나오기도 하고, 동생이 가지고 있는 내 물건을 발견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한 동생의 집에서 다른 동생 남편의 편지가 나오기도 했다.

"도대체 그건 왜 네가 갖고 있는 거냐?"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서로 묻게 되는 말이다. 종종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물건들도 있다. 하긴, 셋이 완전히 헤어지던 그 해 짐을 챙길 때는 소유자를 가리는 일이 짐싸기 중 가장 힘든 일이었다. 옷이든 책이든 심지어 그릇들까지도 거의 함께 산 물건들이 많았으니까. 지금 내가 쓰는 그릇 중에 그때 삼전동 살 때 쓰던 그릇들도 아직 있다.

이제 다시 넷이 모여 살 계획을 하면서는 공동의 것과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 의논하는 중이다. 굳이 따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것들, 각자의 집에 따로 있어야 하는 것들. 아~ 앞으로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옷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동생들 것 빌려 입으면 되니까. 보통 자매들은 옷 때문에 많이 싸운다는데 우린 같이 사는 동안 대부분 옷을 공유해왔다. 빌려주고 빌려입는데 익숙했고, 심지어 공동소유인 것들도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각자 체형이 변하고 취향이 달라져 못입거나 안입는다면 모를까. 그때처럼 지금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겠지만, 그래도 분명 우린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며 더 행복할 것이다.  


언니에게 대답했다.

"왕따 아냐, 서운해 하지 마. 언젠가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엄마아빠 모시고 자주 와서 자고 가."

언니가 대답했다.

"알았어. 땅 사는데 얼마나 부족해? 너 집 팔기 전까지 빌려줄 수 있는 돈 조금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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