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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Bakha Nov 03. 2022

충분한 숨을,

숨을 위한 시간 

학교, 조직 생활을 하다 보면 늘 번아웃에 도달하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20대까지는 '내가 무엇이 문제일까?'라며 자책하고 괴로워만 했고, 

30대부터는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는지 기회가 오면 번번이 당위성으로 포장하여 도전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몸에 문제가 생겨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증상들도 더 다양해지는 것 같다. 


이번 경험을 돌아보면서는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나는 모든 면에서 쫓기고 있었다. 

정성을 쏟으며 사랑했던 일상적인 일들도 해치우듯 하고 있었다. 

식사는 최대한 간편하게 차려내고 빨리 '먹어 치우고' 있었고, 

커피는 빨리 대충 내려 잠을 '깨워내는' 기능이 되어 있었다. 

요가는 호흡을 깊게 음미하지 못한 채 몸을 빨리 '풀어내는' 것에 치중했고,

시간에 쫓기니 그마저도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더 바쁘고 강도 높은 일을 할 때에도 요가 수련은 오히려

나의 리듬과 호흡을 찾고 긴장을 풀어내는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이번에는 왜 그런지 나를 지키는 마지막 수단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이번 조직 생활에서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 중에는 급박하게 일이 돌아갈 때, 

함께 애를 쓰고 호흡을 맞추며 해결해 나갈 때 더 생명력이 돋보이고 빛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로의 호흡에 같이 춤을 추고, 서로 응원하며, 끝이 났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에너지였다. 

나는 그 리듬에 춤을 추기가 어려웠다. 

주저주저하고 끝내 함께 춤을 추지 못해서 미안할 때가 많았다. 

내 역할은 그 호흡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함께 군무를 출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닌, 나 스스로가 나를 소외시키게 된 결과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찾은 시간 속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일부러 더 '충분히' 해 보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니 무기력해졌을 때는 마지못해했던 일들, 포기했던 일들이 

다시 너무나 즐거운 일이 되어 있다. 


충분히 호흡하는 수련하기

몇 달 만에 요가 수련을 찾았다. 늘 가던 곳이 이사를 가서 새로운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을 음미해가며 길게 길게 느리게 느리게 시계를 보지 않는 수련을 가졌다. 

요가원의 커다란 창 풍경 

충분히 식사 준비하기

스스로를 위해 시간을 들여 식사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루꼴라도 사보고, 동네 카페에서 원두를 샀다.

원두는 핸드 그라인더로 갈아 모카포트를 준비해두고, 핸드 거품기에 우유도 따라본다. 

이 계절에 최상의 맛인 노오란 사과와 채소를 담고, 루꼴라는 토마토와 볶아내며 파르마산 파우더도 툭툭 뿌려본다. (냉장고에 너무나 오래 묵혀 있어서 존재도 잊고 있었던 치즈가루...! 상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그 위에는 정성 들여 이쁘게 수란을 만들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우유는 데워 열심히 아주 리드미컬하게 펌프질. 

모양새와 맛은 사실 그다지이지만, 너무나 정성 들여서 맛있는 나를 위한 카페 라테. 

원두는 결국 이름에 이끌려 선택했다. 이래서 작명이 중요한 법. 풍요로운 시간 속으로...!


충분히 음미하고 침묵하기.

잠을 깨우기 위한 커피,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한 디저트...

나를 기능적으로 다루려고 했던 카페인과 디저트가 아닌, 맛과 모양 그 자체로 충분히 음미하기. 

평소처럼 진한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 메뉴가 아니라

내추럴 가공, 블루베리무스 뉘앙스, 워시드 가공... 읽을 수는 있어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열거된 원두로 정성스레 느리게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셔본다. 

작지만 디테일이 가득한 세팅의 초코케익과 크림에 들어간 재료가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며 탐구하듯 맛보기. 

사람과의 대화 속 침묵도 음미해보기. 

핫플로 찾아가던 발걸음을 옮겨, 아주 작지만 근사한 맛을 내는 보물같은 카페를 찾아서 더 기뻤던 날


충분히 바라보기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랑과 오후의 빛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창작물 속에 담긴 사연, 마음과 감정을 충분히 바라보며 느낀다.

충분히 정성스럽게. 


우리에게 충분한 숨을,

며칠 전 우리 모두에게 숨이 막히는 답답한 일이 일어났다. 

2008년부터 서울광장 인근에 거주하며 내 기억에는 분향소를 네 번 방문했다. 

처음은 2009년, 두 번째는 2014년, 그리고 2020년, 그리고 2022년 11월 1일. 


우리의 삶을 기능적으로 해치우듯 살지 아니하고

충분히 감각하고 느끼고 바라보는 숨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숨이 멎으면 삶도 멈춘다. 

멈추어진 호흡들 뒤에 남겨진 슬픈 우리들에게 충분한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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