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마음에 대하여
꼭 이런다. 익숙해질 만도 한 상황인데 매번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무너지고 만다. 예기치 못하게 혼자 방치되었다고 느껴지면 나는 길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가 된다. 밑도 끝도 없이 서럽고, 외롭다. 그런 상태를 자각하면, 어김없이 눈물이 난다.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내 성향에도 잘 맞고, 오히려 늘 누군가와 함께 하는 생활이야말로 큰 도전이 될 것이다. 20년 가까이 1인가구로 살아오며 나 자신이 혼자인 시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을 포함한 학령기, 대학, 직장 등 반강제적 조직 생활을 했던 시기의 내게 가장 중요한 일상 명제는 ‘귀가’ 혹은 ‘집’이다.
어떻게 집에 갈 것인가
언제 집에 갈 것인가
집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아아, 집에 가고 싶다….
그 기간 동안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수학여행, 수련회, 엠티, 오티, 리트릿, 연수 등 강제적인 단체 생활을 너머 한순간의 개구멍을 허용하지 않는, 타인과 24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동시에 나는 지독하게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현재 나의 관계 패턴에는 주 2일 정기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개신교 신자다. 안 가는 것이 찜찜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처치 고어 churchgoer 보다는 진지한 수준이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은 가정교회 식구들과 모여 밥을 해먹기도 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꾸덕진득한 시간을 보내고, 주일에는 예배 후에 교회에 출석한 가정교회 사람들과 식사를 하게 된다. (내가 다니는 교회 교제의 80%는 밥인데, 밥정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 맺음을 한 지 3년 정도 되었는데, 1,2촌 혈족을 제외하면 난생처음으로 이윤과 상관없이 생활을 공유하고 정을 쌓는 고정 그룹이 생긴 셈이다.
가정교회가 외로움을 각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다. 나는 언제나, 진심으로, 한결같이, 처절하게 외로워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외롭기 때문에 용감하게 동거를 한다거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만나는 동호회는 엄두도 못 낼뿐더러, 무엇보다 오래된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늘 눈치를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사람도 나를 만나고 싶은 걸까
내가 일방적으로 원한 건 아닐까
이 사람은 지금 나와 만나도 괜찮을까
(혹시 바쁜데 거절을 못한 건 아닌가)
사실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답이 없네...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써 놓고 보니 더더욱 치졸하고 부끄러운 쭈그리적 사고이지만, 이것이 여러 결핍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나의 현주소다. 여하튼 이런 생각 때문에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는 것은 늘 긴장되고 심장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열의 여덟은 상대방이 연락을 주어서 성사되는 만남이고, 그런 친구들이 현재 나의 오랜 (은인 같은) 지기들이다. (그들의 성격유형이 대체로 infp, infj, enfp라는 사실이 현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런 눈치가 생긴 것은 부모님 관계에서 긴장을 먹고살던 유년시절의 결핍 때문이지만, 극대화된 것은 첫 번째 연애 이후다. 마찬가지로 결핍 덩어리였던 상대는 정신적으로 업다운이 심한 사람이었다. 잘해줄 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다정한 연인이었고, 갑자기 침묵하며 이 세상에 없던 사람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결국은 서로의 미성숙 때문에 건강하게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웠고, 상대방이 해외로 갔을 때 나는 이별을 통보받았다. 엄마에게 유기당하는 공포를 안고 살아온 성인이 첫 번째 연애 상대에게 버림받았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고정적인 관계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유쾌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귀여운 할매다. 나의 결핍과 그의 성품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짚고 싶다.)
연애 후의 유기감은 거절당하는 경험의 상흔과 공포를 낳았다. 어딘가가 크게 다치면 그 부위 비슷한 곳에 약한 통증만 유발되어도 과거의 기억 때문에 뇌가 이것을 굉장히 큰 고통으로 인지하게 되어 공포심을 가지는 것과 유사한데, 이것을 바로 트라우마라고 하던가… 이 경우엔 '내가 상대방을 질리게 해서 떠났다.', '그러니깐 사람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엔 서로가 싫어지게 되고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없어진다.'는 혼자만의 가설이 증명되고 강화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지만 함께 하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일단 나의 체력과 기력 문제다. 이것은 유전적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내 부모와 형제는 약속을 다녀오면 기진맥진 쓰러지고 스트레스 취약한 편이다. 쉽게 피로해지는 민감한 성향도 기질적이고 생물학적인 전략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이제는 조금 덜 억울하지만, '성격이 예민해서 까칠한 아이'라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수식어는 내가 겪는 각종 소화계 및 호흡기, 간염질환 증상을 걱정하는 듯 비난하는 주변 어른들의 간편한 논리가 되어 주었다. (애석하게 숙모는 아직도 그 말을 매번 하신다.) 심지어 한 의사 선생은 '꾀병'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약속을 해 놨는데 당일에 급작스레 피곤해지면서 자리에 가기 싫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조건 1의 눈치력이 충만한 나에게 상태가 좋은 날 급만남을 제안하는 모험은 일반적인 연락보다 두 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상태가 이러하다 보니, 만남이 취소되었을 때는 두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사실 나도 조금 무리가 되는 것이 느껴진 약속이었는데 상대방이 취소를 해주는 경우다.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물론 여전히 상대방과 만나고 싶지만, 내 집중력이 질적으로 떨어질 것을 예상하니 상대방에게 미안해질 바에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상대방이 먼저 취소 연락을 하다니 죄책감까지 덜어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다. 스스로의 역량을 잘 알기에, 나의 일정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편이다. 만남을 위해 앞뒤 체력 및 자극을 보완할 완충 기간(=혼자 있는 시간)을 배치한다던가, 그 일정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자잘한 일처리 동선 계획(=에너지 효율 극대화) 같은 것이다.
기록하고 보니 스스로도 피곤하고 퇴행적인 것 같아 슬프지만... 이왕 시작한 것 다 까발려야겠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남을 준비하다 보니 예기치 못하게 약속이 취소되었을 때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런 복잡한 사정과 정신적 혼란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수이다. 나를 세상 피곤한 사람으로 인지해서 정말로 영영 떠날까 무섭다. (조건 1 유기공포의 연장선)
대체적으로 취소되는 경우까지 대비하는 편이다. 기질상 플랜 B가 디폴트 값으로 탑재가 되어있지만, 감정이 이성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경우가 발생하면 자기 연민과 고독감이 넘쳐흘려서 눈물이 흐른다. 그럴 때면 너무 부끄럽다. 케이트 블란쳇이 분한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이 된 것 같거든... 슬프게도 감정의 문제는 예측과 대안이 불가능하다. 쏟아내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차마 말은 못 하고 이렇게 혼자 벽을 보며 쓰고 있는 것이다!!! (아직 연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외로움의 화신이 된 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는 괴물이 되고야 만다.
오늘은 날씨마저 너무 쾌청하고 좋다. 4월의 마지막 날, 바람도 선선하고 먼지 없는 하늘이 새파란 이상적인 봄 날씨다. 가정교회(이하, ‘가교’) 식구들 중 가족여행을 간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날이었지만, 이기적인 나는 좋은 날씨가 야속하기만 하다. (아마 날씨가 안 좋으면 더 부정적인 감정에 취하며 더 서러워했겠지만.) J언니는 일이 밀려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할 상황이라 나오지 못하고, K는 교회 지인과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멤버 - S언니와 M과 함께 예배 후에 식사를 하고 티타임을 하겠구나 하고 확신해 버렸다. 원래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월요일의 컨디션을 위해 점심 만남에 집중하기로 하고 일어나자마자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교회로 나서기 전 S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체해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언니가 아픈 것은 싫지만 내심 아쉽기도 했다. M은 아직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둘이 만나면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 더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이 어려워할 수 있으니 플랜 B도 대강 고려하고 집을 나섰다.
버스와 거리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광화문과 종로 일대로 나들이를 나온 것 같다. 예배당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예배당의 사람들이 아까 그 버스와 거리로 나갔나 보다.
오전 예배가 끝나고 용기 내어 M에게 연락했다. K의 약속이 M의 지인이기도 해서 셋이 만난다고 했다. 식사를 한 후 함께 오후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색할 수 있었는데 잘 되었다고 안도와 동시에(고독상황 A) 예배당에서 삼삼오오 무리 지어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걸어 나가는 자신이 갑자기 너무 불쌍했다. 그렇다, 사실 지금 너무 섭섭하다. 그런데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이 상황, 오히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도, 즐거운 만남을 기뻐해주는 마음도 사라진, 다른 사라들의 일정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나의 부족함을 봐야 하는 이 상황에서 단지 내가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끼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구약성경 ‘룻기’는 ‘룻’이라는 여성에 대한 아주 짧은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게 되는데,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룻은 모든 것을 잃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떠나는 모험을 한다. 아주 오랜 세월 후, 그녀가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만난 보아스라는 사람과 낳는 자손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 룻기는 성경 내에서도 굉장히 맥락 없이 등장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몇 안 되는 책이며 서술 방식 또한 여느 책과 달리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룻의 삶을 관통하는 은혜와 우연을 통해 신의 개입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행동처럼 고통받아 울부짖는 누군가의 ‘곁’을 지키자는 설교를 불과 5분 전에 들었는데 참 허망하다. 공감능력 따위는 사라지고 이기심과 섭섭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하지만 나오미처럼 고통받는 상황이라면 전능자에게 부르짖자라고도 하셨으니… 은밀하지만 만천하에 공개된 나의 노트에 기록하며 울부짖는다. 나의 고독과 지질함에 관하여…
주여, 나를 왜 이렇게 지질하게 만드셨나요…!! 크앙….
나도 성숙해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