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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Bakha Jun 07. 2023

[마음] 동생은 모르는
맏이의 기억

돌봄의 주체로 살아가기 

83년 생인 오빠와 2살 터울인 나는 80년대의 전형적인 4인 핵가족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in-서울 명문대, 의대/법대가 키워드인 교육 환경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범적인 부모의 모범생 아들 딸로 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머리가 큰 후로는 각자의 학업과 생존에 집중하느라 남매로서의 정서적인 관계 맺기는 거의 부재했다. 내가 고2가 되던 해에, 오빠는 진주 소재의 의대에 합격해 집을 떠났다. 가까운 지역이라 주말에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대학생인 오빠는 학기 중엔 공부, 방학에는 열심히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20대를 꽃피우느라 분주했고, 예고에서 회화 전공을 했던 나도 입시를 본격 준비하며 실기와 학업으로 가장 바빴던 시기였다. 


2년 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서울이라는 지역 문화, 그리고 나름대로 이름난 대학에서의 교육 환경은 분명 내게 확장된 경험과 더 나은 지식을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성공의 사다리는 끝이 없다는 사실, 또 그것을 이루기에 나는 턱없이 부족한 내적능력과 외적자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문여대 예술대학 학생들은 어쩜 그리 다 부유하고, 수행능력도 외모도 출중한지. 풍족하게 자라왔다고 자부한 내가 이렇게 박탈감을 느끼게 될 줄은. 나는 이 세계에서 먼지 같은 존재였고, 과업은 끝이 없었다. 자신이 없어졌다. 사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은 어떤 유희나 다양한 교류 없이 학교-기숙사/집 루틴 만을 반복하며 소처럼 노력해 일구어 낸 결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는 것에도 자신이 없어졌고, 그런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휴학을 자주 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이 내가 정말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공부를 해서 어떻게 사회의 직업으로 연결되는 지도 몰랐던 당시를 회고하면, 난 정말 무식하게 공부만 하던 종류의 학생이었다.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은 현실의 벽이 모든 것을 너무나 무력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하건 '잘' 해야 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뭘 해도 어느 정도는 '잘' 할 수 있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모든 영역에는 부조리한 구조가 있기 마련인데 그 납득하기 힘든 부분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것에 열정도 없었다. 그 열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비싼 학비를 내고 학생으로 지내면서 나의 고통과 의문을 들고 교수를 찾아가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 왜 나는 한 번도 교수님께 내 고민을 상의하지 못했지? 그것이 그들의 역할인데! 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심지어 졸업반 때는 학과장 교수님과 진로상담 시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은 이런 내적 고민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는 것,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런 건 다 혼자 참고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말할 수 없었고, 형제가 있었지만 형제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깐. 


나와 달리, 오빠는 의과대학 생활을 하면서 호혜적인 공동체를 경험했던 것 같다. 학기 중엔 공부할 시간도 모자란 커리큘럼과 학교 밖에는 20대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어떤 유익한 것이 없는 노령화 지역이라는 환경 속에서 학교 친구들과 5년 이상 거의 모든 생활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돈독한 인연이 직장 동료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참 부럽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둘 다 30대가 되었을 무렵, 나는 유일한 형제인 오빠와 고민을 나누지 못한 세월이 참 많이 아쉬웠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오빠는 앞으로는 더 소통이 멀어질 가능성이 컸고 예상대로였다. 이번달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한 오빠와 새언니는 많은 부부들이 그러하듯, 조카들의 양육을 중심으로 모든 삶을 재편했다. 


어제 남자친구와 함께 대구에서 오빠 가족을 만났다. 가을에 학회를 겸해서 아이들과 함께 코펜하겐으로 여행 간다는 이야기가 어릴 적 아버지의 장기 출장에 동행한 엄마와 외할머니 댁에 맡겨진 우리 남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처음으로 우리가 가진 기억의 격차를 발견했다. 


당시 오빠 나이가 7살, 나는 5살이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아침엔 늘 밥과 국을 먹던 나에게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땅콩버터(정말 싫어했던)를 바른 토스트를 억지로 먹는 것은 정말 곤혹이었다는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신식 할머니...) 그래서 엄마를 더 원망했던 기억. 심지어 내가 원했던 선물(빨간 구두)을 공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배신감(검정 구두를 사다 주심)만이 범벅되어 있었던 어두운 기억 중에 하나였다. 내 기억 속에서 나는 감정 만으로 가득 차 이었다. 

오빠가 그 시기를 기억하는 것은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긴장이었다. 부모님이 오빠에게 괜찮겠냐고 물어봤을 때는 괜찮은 척 시크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둘만 남고 나니, 오빠는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긴장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유치원 캠프가 잡혀있었는데 참석하고 싶어 했던 동생(내가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건 오빠의 과잉보호 때문인가?)도 보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자신도 캠프를 가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둘 다 캠프를 안 가서 외할머니가 독박 육아를 했을 테지...) 나에게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기억이었다. 

또 하나는, 지금도 부모님 댁에 남아있는 나무 서랍장에 붙여진 바랜 견출지의 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원래 붙어있는 이름표였다. 위의 두 칸은 오빠 이름이, 아래 두 칸은 내 이름이 쓰여있다. 이 이름이 써진 것이 바로 부모님의 장기출장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오빠를 통해 듣고 나니, 신기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우리 옷을 가지러 집으로 갔던 일 말이다. 엄마가 우리 옷을 챙겨주라고 붙여놓은 이름표라고 한다. 


오빠의 기억은 나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오빠의 기억 속에는 늘 '동생', '책임져야 할 존재'가 등장했다. 그렇게 보니 소통이 부재한 환경에 더해 막내로서의 삶이 내 내면의 유아성, 자기 중심성을 더 고착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소통도 잘 못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한 것인가?!)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른 또 다른 기억은, 아오리 사과에 얽힌 기억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최고의 여름 과일은 아오리 사과이다. 어느 비 갠 여름날에 오빠와 둘이서만 외할머니댁을 걸어간 일이 있었다. 비슷하게 둘 다 유치원생인 시기였다. 남매가 아오리 사과를 하나씩 베어 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길 여기저기 물 웅덩이가 있었는데, 나는 내 사과를 웅덩이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울었고, 오빠가 구시렁대며 그것을 주웠다. 그리고 본인이 먹던 사과를 나에게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너무 고마웠는지 아직도 그날 입었던 노란 원피스까지도 기억난다. 엄마인지 외할머니인지 누군가에게 오빠가 자기 사과를 줬다고 자랑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오빠는 늘 나를 귀찮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까지는 상당히 나를 이뻐했다고 한다.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b

맏이에게는 어느 시기부터는 늘 '동생'이 있다. 첫째 조카 시현이도 무언가 주면 늘 동생 것까지 챙긴다. 심지어 양보도 잘한다. 맏이라고 무조건 사회성이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양보하고 돌보는 것에는 조금 더 익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맏이와 막내가 가진 기억의 결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며,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고 챙길 때 성숙할 수 있다는 섭리를 새삼스레 확인한다. 동생이 있어본 적 없는 채로 20년 가까이 자신만을 가까스로 돌보며 1인가구로 살아온 막내로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책임지고 돌본다는 일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럽다. 자꾸만 나더러 유기견이나 고양이를 입양하라고, 삶이 달라질 것이라 종용하는 우리 과수원 요가원 원장님^^. 그 이유가 이 맥락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은 너무나 수고스럽고 부담스럽지만, 그 보람과 돌보는 생명 자체가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길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게 되면 아이에게 너무 좋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나로서는, 반려동물의 식비와 병원비를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다.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친구 수연이의 반려묘 앙코도 있지만, 나와 유사한 질환으로 하루 걸러 병원에 가게 되는 수빈 언니네 하랑이도 있다. 내가 낳는 자식이라도 동일하게 막막한 것은 사실이다. 원장님 말씀처럼, 반려 동물 가족이든 사람 가족이든 돌봄의 주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르면 이를수록 성숙한 인간이 되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동시에 찾아온 결혼과 부모님의 고령화가 책임과 돌봄의 첫 번째 훈련이 될 것 같다. '너는 니 멋대로 살았다.'라고 내 인생을 평하신 울 어머니, 허순임 여사의 말이 갑자기 와닿는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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