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하나님 되기
2024.3.16 Fri
누가복음 13:1-34
오늘 묵상한 누가복음 본문에 까마귀가 나왔다. 마침 산책 중에 까마귀가 재갈매기와 비행전투를 벌이고 있어 하염없이 한동안 바라 보았다.
짐승과 식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결코 자신 외에 다른 것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갈매기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까마귀는 까마귀로 태어나 까마귀로 죽는다. 가마우지는 유분 없는 깃털 덕분에 오랫동안 잠수를 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차디찬 겨울바람에 날개를 펴고 깃을 건조하는 고통과 수고를 감내한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감내해야 하는 각종 수고를 증오한다. 왜 그것을 미워하게 되었을까? 노동의 고통이 원죄의 결과로 주어졌기 때문일까? 그 때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벌은 노동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감각이 아니라, ‘불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지어 창조주도 성실히 일하신다. 노동 자체는 무오 하다. 그렇다면 노동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노동의 동기 아닌가.
흔히들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좋아하던 일도 벌이가 되면 고통스러워 진다. 그 노동을 통해 얻는 것이 돈, 명예, 권력, 자격… 무엇이든 간에 그 일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획득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라면… 노동은 고통이다.
불안은 어떻게 발생했을까 짚어보면,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창조주에게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온전했던 평온의 관계를 스스로 깨고 나온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스스로 지켜야 하는 삶은 불안하다. 인간은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완전한 균형 밖으로 벗어나 악착같이 노력해서 균형 비슷한 상태를 가까스로 유지할 뿐, 완전해질 수 없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시 절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습관이 무서운지라 이 마저도 사람은 악착같이 ‘노오력’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매주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많이 했으니… 구원받았다고 내심 안심하고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은 자격 없는 존재가 도움을 받기로 하는 그 ‘결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 내면 깊은 동의(agreement)를 ‘믿음'(faith)이라고 일컫는다. 노력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인간은 애초에 구원을 얻을 자격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 ‘사랑’, ‘선물'이라는 속성으로 부연한다. 성경 관점에서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아와 같이 세상에 버려진 존재이다.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자신과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 등을 자신들과 구분하며 악한 죄인 취급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불가촉천민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 특히 인간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불가촉천민이 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런 죄가 없는 신적 존재, 자신의 아들 예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고 그 아들을 모든 인류를 대신해 희생 제물로 바친다.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던 일을 동일하게 자신이 하신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자신과 함께 만물을 통치하게 하신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 이야기를 유일한 길로 수용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아들과 동일하게 자녀로서의 자격을 주기로 약속하셨다. 구원의 섭리에서부터 인간 편에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곧 ‘인간의 하나님 되기’와도 같다. 원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 그것은 ‘하나님 나라'(His Kingdom, Kingdom of Heaven)이 이 세상 끝까지 완전히 입혀지는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유보된 현재의 시간 동안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이다. 곧, 신으로, 예수처럼 살아가라. 신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이라고 착각한 인간의 원죄는 영원한 죽음이었고, 다시 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하는 신적 영원, 생명이었다.
예수처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얼마 전 읽었던 블룸하르트 부자의 설교집에서 제발 ‘나'를 잊으라는 간청(?)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운 속의 독일도 21세기 초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놀랍지만, 지금 시대만큼 ‘나'에 집착하는 사회가 있을까. SNS, 인스타그램에는 온통 내 감정, 내 얼굴, 내 일상,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나'를 드러내기에 바쁘다. 내 인스타그램도 다르지 않아서 이따금 스스로 역겹다.
예수가 예수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자신을 잊었다. 모든 존재 이유를 아버지의 보내심으로 귀결시켰다. 예수가 개성이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는 그 시대에도 지금도… 영원히 너무나 독특한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다다를 수 없는 무오 한 성품과 사랑으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다움은 자기가 되려고 애쓰는 것에서 얻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행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상태 - 영적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착각하고 오랜 시간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내'가 되려고 ‘노오력’했다. 심지어 그런 ‘다움', ‘정체성'에 대해 연구하고 구축하는 일을 직업적으로 수행했었다.
자기다움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정된 선에서 자신의 행태, 배경, 취향 등을 끌어모아 펼쳐놓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기만에 가깝다.) 정체성은 자신을 벗어나 더 숭고한 정신(뜻, 목적, 가치)을 따라 행위를 반복할 때 구축된다. 그런 존재들은 이미 자신에 대해 ‘잊었다’.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더 높은 가치에 천착한다… 그것이 누가복음 12장에서 말한 ‘하나님께 부요한 자 rich in relation to Go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삶은 반드시 타자를 위해 헌신할 수 밖에 없다. 예수가 돌보라고 맡긴 잃어버린 양들. 블룸하르트는 이 양에 대해 결코 판단하지 말라 경고한다. 가라지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몫, 우리로서는 모든 존재를 편견 없이 사랑할 대상으로 열어놓는 수밖에 없다고.
누가복음에서 삶의 현실적 문제에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삶은 음식 이상이고(more than food), 몸은 의복 이상의 가치이니 (more than clothing), 우리의 필요는 아버지께(서 책임 지시리라는 신뢰) 맡겨드리고 영원히 소진되지 않는 전대(money belt)를 만드는 삶을 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삶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연금 보험이 내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보험도 없지만…)
오늘 나는 내게 주신 것들로 하나님 나라의 썩지 않는 전대를 만들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블룸하르트 목사가 당부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철학' ‘사유'하지 말라 한다… ㅋㅎ 생각을 멈추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전능자에게 열려 있으라고... 사유만 하지 말고 제발, 제발,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 외친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 그 형상대로 살아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간절히 필요한 방향이다. 닥치고 움직여라…
일단 책과 컴퓨터를 덮고 일어나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