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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Nov 07. 2022

4년 만에 재취업을 했다.

<커리어 그리고 가정>, 클라우디아 골딘 (1)

4년간의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다시 직장일을 시작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일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역시 전문직이 좋네요. 언제라도 다시 일할 수 있잖아요."


나는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 그렇지만 딱히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지는 않다 보니 내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에도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했다. "전문직이시니까, 미국에 돌아가면 언제라도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딱히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자니 설명이 길어져서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그러면서 종종 생각했다. 나는 왜 변호사면서도 전문 분야에 지식과 경험을 쌓지 못하고 직장에서 사무일이나 보다가 애들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그렇게 변변치 못하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첫아이를 낳은 후에 로스쿨에 진학했다. 주변 사람들도 회의했고 나도 딱히 자신감은 없었지만, 로스쿨입학시험(LSAT)에서 상위 1%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가 학교를 시작할 때 아이는 18개월이었다.


로스쿨 공부도 적성에 잘 맞았다. 나보다 열 살 어린 미국 학생들이랑 같이 공부하는데, 그들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들이면서도 성적이 잘 나왔다. 한 학기 해보니까 할 만해서 2학기에는 둘째를 임신했다. 재학 중에 부모가 된 사람은 학위를 받을 때 아이를 안고 단상에 올라갈 수 있는데, 졸업식 때 아이를 안고 올라간 여자는 나뿐이었다. 변호사 자격증 시험도 한 번에 통과했다.


그런데 나는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우수한 변호사가 되지는 못했다. 아니 우수하기는 커녕 제대로 된 전문직 변호사가 되지도 못했다. 왜 나는 이렇게 되었는가 한동안 많이 고민했는데,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다가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그만둬 버렸다.


나는 내 사연이 특이해서 나 같은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국의 고학력 전문직 부부에게는 흔한 스토리였다. 그래서 결국 이 주제로 책을 낸 사람도 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가 쓴 <커리어 그리고 가정 Career and Family> 이다. 2021년 신간이니 아직 생생한 현재진행형이다.


내 사연이 아닌 골딘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서로 비슷한 수준의 학벌과 학위를 가진 고학력 부부의 커리어 시작은 비슷하다. 골딘 교수는 최소 대졸 이상, 특히 MBA나 JD(법대졸업), MD(의대졸업) 학위를 가진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단순한 '일자리(job)'가 아닌 '커리어(career)'를 추구하는 여성들을 연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력이 대졸 이상이어야 했고, 또 남편에 비해 능력 면에서 뒤질 것이 없다는 게 증명된 여성들을 연구하려다 보니 결국 전문대학원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비슷한 수준의 학벌과 학위를 가진 고학력 부부의 커리어 시작점은 비슷하고, 이것은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다. 전문직 능력남과 결혼한다 해서 여자들이 커리어 야심을 접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첫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들의 커리어 여정은 갈라지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것, 또는 아이가 있는 가정을 운영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비록 이리저리 외주를 준다 해도 그걸 관리하는 일이 한가득이라서 이전처럼 부부가 둘다 커리어에 매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때 이상적인 상황은 남녀 모두 공평히 회사일을 줄이고 집안일을 나눠 맡는 것인데, 비록 당사자 부부는 그걸 원한다 해도 미국 노동시장의 보상체계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각자 주 40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던 부부가 아이가 태어난 후 둘 다 일을 줄여서 주 30시간씩 일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공평하긴 한데 부부 총소득이 줄어든다. 아이가 태어나서 돈은 더 많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예전처럼 부부 합산 80시간씩 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때 부부 둘 다 조금씩 일을 줄이는 것보다, 한 사람만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20시간) 나머지 한 사람은 그대로 풀타임으로(40시간) 일하면, 부부 합산 노동시간은 똑같이 60시간이지만 각각 30시간씩 일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가계소득을 올리게 된다.


그 이유는 과도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크게 보상하는 미국의 노동구조 때문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전문직이나 관리직에서는 시간당 아르바이트를 하듯이 일하는 시간에 정비례해서 보상을 주지 않는다. 대신 더 긴 시간 일하고 더 불규칙한 시간대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보상을 준다. 직장에 '상시대기(on call)'가 가능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보상과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통해 그들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서 계속해서 더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가 태어난 후 부부의 최적화 전략은 한 사람은 직장에 상시대기, 다른 한 사람은 일을 그만두지는 않더라도 좀 더 적은 시간 동안 규칙적인 시간대에 근무하면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정에 상시대기할 수 있는 역할을 맡는 쪽으로 분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부부 합산 총소득을 최고로 올리면서 아이도 그럭저럭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적은 시간, 또는 더 규칙적이거나 유연한 시간대에 일을 하는 사람은 느슨하게 일을 계속할 수는 있지만 커리어가 정체된다. 일한 시간에 비례해서 당장의 소득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커리어적 성장과 승진의 기회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미래의 소득도 줄어드는 것이다. 30대 초중반에 이렇게 잘나가는 커리어 트랙에서 탈락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걸 만회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 반대로 이 때 잘나가는 커리어 트랙을 유지하면 나중에는 몇 배의 소득을 올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미국 가정에서 직장에 상시대기하는 역할은 남자가, 가정에 상시대기하는 역할은 여자가 맡는다. 그렇게 부부가 분업을 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커리어는 각기 다른 그래프를 그리게 되고 (남자 쪽 커리어는 성장하고 여자 쪽 커리어는 정체된다), 두 사람의 소득차이는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정에 신경쓸 일은 더 많아지고 가계총소득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남자 쪽의 전문직 커리어는 계속 성장하여 외벌이로도 충분한 수준이 된다), 여자 쪽은 점점 일을 줄이다가 나중에는 그만두게 된다.


여자 쪽이 일을 아예 그만두지는 않을 수도 있고 아이들이 더 자란 후에 다시 재취업을 하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이미 커리어의 골든타임을 놓쳤기 때문에 고학력 전문직 여성의 생애 총소득은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위를 받은, 즉 시작점이 같았던 남자 동기들의 총소득에는 크게 못 미치게 된다. 이건 의사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긴 시간 일하면 큰 보상을 주는 세부 업종에는 남자 의사, 남자 변호사들이 몰려 있고, 많은 여자 의사, 여자 변호사들은 느슨하고 길게 가는 세부 업종을 선호하는 현상이 있다.


그리하여 골딘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남자의 소득이 여자의 소득보다 높은 이유는 법적으로 성별에 따른 임금차별이 남아 있어서도 아니고 (법적인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성별에 대한 무의식적인 편견이 남아 있어서도 아니다 (오랜 동안의 교육으로 그 부분도 많이 해결됐다). 진짜 이유는 유자녀 가정을 경영하는 합리적인 부부가 커리어 vs 가정이라는 분업을 선택하여, 둘 다 어중간한 소득을 올리기보다는 한 사람의 커리어와 소득성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쪽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골딘 교수는 같은 스펙을 가진 남녀의 소득을 가르는 것은 성별 여부도 결혼 여부도 아닌 출산 여부라는 것을 들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은 고학력 전문직 여성은 커리어 그래프와 평균 소득이 남자 동기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똑똑한 여학생들이 미국의 대학과 전문대학원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데 왜 사회에 진출한 후 그들의 커리어 성장과 소득은 남자 동기들에 훨씬 못미치는가에 대한 골딘 교수의 분석이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했는데, 왜 선택을 거듭할수록 내 커리어는 점점 비틀거리며 저공비행만 계속했는가 하는 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긴긴 대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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