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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Jul 09. 2024

제이미 다이먼 신드롬

집에 있으면 가슴이 조여온다.

나는 여태까지 우울증약, 수면제, 상담요법 등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자살충동, 산후우울증, 공황장애도 모르고 살아와서, 몸에도 건강체력이 있다면 나는 정신건강체력이 좋은가보다 여겼다. 그런데 요즘 종종, 아무 일도 없는데 심장이 조이는 조바심이 느껴져서 이게 왠일인가 의아해해고 있다.


출산 중 사망이나 신생아 사망, 각종 전염병 등 예전 세상에 흔했던 병은 많이 사라진 대신 변한 세상에 맞춰 새로이 나타나는 건강문제가 많으니까, 그런 증상 중 하나가 나에게 나타난 것인가보다 한다. 나라고 예외일 리는 없으니까. 아니면 나이들면서 몸에 노화가 오듯이 감정이나 정신건강에도 노화가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15년 동안 아이들 키우면서 너무 많은 결정을 내리다보니 관절이 닳듯이 마음도 닳은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과 집안 관련해서 하루에도 몇 가지씩 크고 작은 수많은 결정, 그리고 그 모든 결정을 하려면 더 많은 정보수집과 미래예측을 해야 한다. 일정 수준의 위험부담과 그에 대한 책임감수도 언제나 함께. 마음이 닳고 지칠 수밖에 없다.




우리 부부는 지금 나의 증상을 "제이미 다이먼 병" 이라고 부른다.


제이미 다이먼은 북미 최대 은행인 JP 모건 체이스 뱅크의 회장이다. 2006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중간에 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한 달 만에 회사에 복귀했다. 왜냐면 제이미 다이먼은 회사에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서, 자기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고 일이 곧 본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겐 자기 직업, 자기 커리어가 정체성이 된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다 또는 연기하다 죽고 싶어요, 그런 예술가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자기 이름 걸어 크게 성공하고 알려진 사람들도 일이 자기 정체성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랑 남편은 그 마음을 잘 모른다. 우리는 불행히도 또는 다행히도 우리의 직업이나 회사, 또는 경력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회사에서 없으면 안 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 없이도 우리들 회사는 다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정에서의 나는 제이미 다이먼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나 없으면 우리 가정은 안 돌아갈 것 같은 불안함. 가족들 밥은? 아이들의 일과는? 여행 계획은? 남편 회사는? 자식들의 성취나 매끄럽게 돌아가는 다복한 가정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느새 나는 나 없으면 우리 집이 안 돌아갈까봐, 암수술을 받더라도 병상에 편히 누워 있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복귀할 것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7월 1일 월요일부터 아이들이 본격적인 방학 스케줄을 시작한다. 모두의 스케줄이 정해졌으니 나도 이제 하루의 일과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4주일간 계획대로 일과를 수행하고 나서 7월 말에 나만 혼자 2주일간 한국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말이다.


성수기에 한국행은 갑자기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올해 말에 만료되는 항공 마일리지가 딱 표 한 장 나올 만큼 있어서 몇 주 전에 무심코 걸어 놨던 예약대기가 갑자기 풀렸다. 마침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여름 동안 집에 있어서 지금이 아니면 나홀로 한국행 기회는 당분간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을 먹었다.


4주간 반복하며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 하루의 일과표와 그 후에는 떠날 계획을 세워놓고 나니 조바심과 불안의 레벨이 일단은 많이 내려갔다.... 고 생각했는데,


한 주 내내 시도때도 없이 가슴이 조이는 증상은 계속되었다.


혹시 몸의 병이 아닌가 싶어 주말 동안 실험삼아 최대한 힘을 뺐다. 마침 둘째가 3박4일 교회 수련회를 갔고 첫째는 금요일 토요일 연속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온종일 나가 있었다. 집안은 한 번 정리한 상태에서 어질러지지 않았고 남편과 둘이서 식사는 다 사다 먹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했다.


놀랍게도 주말 내내 가슴조임이 없었다. 몸의 병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또 발견했는데, 밤이 되어 하루 일과가 끝나고 온 가족이 잠들고 나면 그때도 가슴조임이 없다. 역시나 마음의 문제인가 보다.


내가 집안에 있고 아이들이 집안에 있는 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책임감과 부담감. 남편도 애들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붙들고 화를 내고 불평을 하니, 가족들이 같이 있는 게 내겐 스트레스가 될 수 밖에.


어깨를 올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한다. 나는 제이미 다이먼이 아니다.


아니, 한때는 내가 이 집의 제이미 다이먼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 지난 15년 동안 나는 이 집의 제이미 다이먼이었다. 이 가정의 모든 질서와 안정, 그리고 성장과 전진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젠 다시 조금씩 내려놓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제 부모의 시선 밖에서의 자유와 독립이 필요하고, 내가 계획하고 실행해서 아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어쩌면 가슴이 조이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내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없어서. 안될 게 뻔한 일을 자꾸 하려다 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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