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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Dec 19. 2022

그녀에게 깊이 남은 <칼자국>

작가에게,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칼자국>은 김애란의 자전적인 소설로 2007년 <침이 고인다>라는 소설집에 발표됐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25년 동안 국숫집으로 살림을 꾸려온 어머니는 칼처럼 강하다. 하지만 딸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강인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남편을 멀리서 바라보는 어머니의 속내는 여자로서 한없이 무뎌져 있다. 작가는 더 깊은 곳까지는 다가가지 않는다. 칼은 세월 속에 닳지만 사라지지 않으며 어린 딸을 당당하게 키우고 딸의 혈관 속에 새겨진 칼자국은 금방 드러난다.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애란, 그녀의 언어는 도마 위를 굴러다니는 무 조각처럼 생명력을 갖고 있다. 묘사는 디테일하고 그림이 그려지는 듯하다.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그린다. 건조하지만 따뜻하며 날카로움은 잃지 않는다. 후반부의 안타까운 상황을 나타내는 언어도 감정적이지 않다.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건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왜 칼처럼 아픈지, 소설을 읽는 이들은 주인공처럼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80년생인 김애란 작가는 2002년 한예종 극작과 4학년 때 단편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제1회 대산대학 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2003년 문예지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리며 등단한다. 그녀가 2017년까지 받은 상은 열한 개에 달한다. 문학계에서 주목하는 소설가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201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침묵의 미래>를 읽고 김애란이라는 작가가 궁금해졌다. 이후 그녀의 작품을 차례로 찾아 읽으며 나의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각인된 작가다.


이번에 처음 읽은 <칼자국>에서 보여주는 은유적인 표현방식은 글을 자꾸 되새김질하게 한다. 작가는 인물의 단편적인 일부분의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피부를 뚫고 그 깊은 속내를 꿰뚫는 시간과 관계를 전달한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나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p.8)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p.51)


주인공처럼 나도 순수한 허기를 느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저 엄마의 밥상이 늘 놀랍다고 생각해왔다. 학창 시절 등교 시간과 관계없이 단 하루도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던 나에겐 어머니의 <칼자국>이 주인공처럼 피부 깊숙이 남아 있다. 식탁 위에 얼마나 많은 칼질이 놓여 있었는지 생각해 보니 섬뜩한 마음마저 든다.


호흡이 짧은 단편이라서 서사적인 부분은 약하다. 긴 호흡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는 아쉬울 수도 있다. 조금 더 주인공과 어머니에 관한 사연을 듣고 싶을 수도. 2018년 창비의 책에 추가된 삽화는 볼륨감을 주어 책을 풍성하게 한다. 작가의 글에 색을 입혔다. 하지만 사과를 깎아 먹는 부분에서 깎지 않은 빨간 사과를 들고 먹는 그림이 나오니 어리둥절해졌다. 책 읽기를 포기한 ‘독포자’들에게 접근성을 높여주려는 의도에서 일러스트를 추가했다는 출판사의 의도(예스 24 책 소개 중)가 오히려 ‘독서의 상상력’을 방해하는 '옥에 티'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든다.


단편이 갖는 모호함이나 어두움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며 톡톡 튀는 문체라서 가독성도 좋다. 독서력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가벼움은 짧은 길이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 짧은 언어 속에서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긴 삶을 돌이켜보게 될 것이다. 단편이나 중편의 소설을 좋아하거나 김애란의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권할만하다. 또한 필사를 많이 하는 책이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구성이나 문장력을 배우는 훌륭한 교본이 될 수도 있겠다. 얼마전 <바깥은 여름>을 다시 읽었는데 김애란의 또다른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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