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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a Feb 03. 2023

나의 예쁘고 커다란 고래

<어떻게 여행 가방에 고래를 넣을까>를 읽고 만난 질문


3월부터 아이들 독서토론 봉사가 있어서 책을 선정하는 회의가 있다. 사전 준비를 하려고 집 앞의 도서관에 갔다. 남자들에겐 라면을 끓여 먹으라고 했다. 점심시간까지 쪼개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전에 미리 봐둔 책 말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 검색해서 도서관에서 빠르게 책을 찾았다. 대여하고 책 소독을 한 후 읽으면서 정리하는데 한 시간도 안 돼서 잠이 쏟아졌다. 요즘 큰아이가 늦게 자는 데다가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어서 편안히 잠을 못 자고 있다. 카페인이 절실했다.


자주 가던 카페의 진한 카푸치노를 마다. 카페는 꽤나 시끄러웠지만 역시 집중이 잘 됐다. 따아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이 진동을 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필요한 책이 있는 다른 도서관으로 갔다. 그 도서관은 숲 속 도서관이다. 근처에 넓은 공원이 있고 캠핑장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기분이 좋아지는 장소다. 거기서 대여할 네 권 중 한 권이 청구기호 자리에 없었다. 사서 분들이 열심히 찾아보셨지만 결국 없어서 그곳에 있는 책들만 읽었다. 도서관을 다니면서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오늘 읽은 책들은 거의 재미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책은 아주 짧은 그림책이었다. 다른 책들보다 그림이 뛰어난 것도 별 내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뭉클한 마음에 잠시 호흡을 멈췄다.


그 책은 <어떻게 여행 가방에 고래를 넣을까>였다. 구리디라는 작가의 그림책이다. 구리디는 스페인 세비야 예술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쓰고 그린 책 <두 갈래 길>로 2018년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 픽션 부문에서 우수상을, 그림을 그린 <고집불통 4번 양>으로 마드리드 서점 연합 선정 올해의 책, 네 마리 고양이 재단상 등을 받았다.


이 책의 첫 장에 아주 조그맣게 쓰여있다.

"두려움을 피해 당당히 살아남고자 매일매일 맞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 구리디"

지금 머무는 곳에 있을 수가 없는 주인공은 무척 중요한 여행을 결심한다. 작가가 말하듯이 두려움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커다란 고래를 작은 가방에 힘들지만 정성껏 집어넣고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전부다.


나는 나의 고래에게 이야기해요
더 이상 여기 머물 수 없다고,
무척 중요한 여행이라고


책 속의 주인공 얼굴은 자세히 그려져있지 않다. 표정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밝지 않은 건 느낄 수 있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왜 이 이야기가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그저 그 빨간 고래에 꽂혀서 계속 질문이 피부를 뚫고 온몸을 흔들었다.


나의 고래는 무엇일까,

말도 안 되게 커서 도저히 가방 안에 들어가지도 않는 것,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것,

꼭꼭 챙겨서 삶이라는 여행에 동행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표지 그림의 고래만큼 커다란 질문이 쏟아졌다.


잠시 고개를 들고 도서관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오후의 햇볕을 바라봤다. 그냥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때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어린 아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15개월 정도의 아가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어깨까지 자란 머리를 찰랑거리며 도서관을 누비고 있었다. 유아자료실이라서 아주 낮은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을 총총 뛰다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입으로는 노래인지 주문인지 모를 소리를 반복해서 냈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다시 빙 돌아서 계단 위로 와서는 또 맨 아래 칸까지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를 쓰는 천사처럼 중얼거리며 내려갔다.


고래에 대한 상념은 그 귀여움의 극치에 부딪혔다. 엄마 미소를 지으며 아가를 바라보다가 알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바로 나의 고래다. 너무나 커다랗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게를 가진 사랑스러운 고래! 바로 그 고래를 책의 주인공처럼, 잘 접히지 않는 꼬리도 넣고 마침내 온몸을 다 접어서 여행 가방에 넣는다. 이제 가방에 넣었으니 출발한다. 가야 할 그곳이 어디인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이 비로소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어마어마한 고래도 함께 넣고 가방을 앞뒤로 흔들면서 경쾌하게 출발한다. 어디로든. 룰루랄라!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이 책을 읽고 가벼워지면 좋겠다. 그들도 그들의 커다란 고래를 챙겼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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