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작은 입술로 말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작은 떨림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나는 너를 빤히 쳐다봤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런 순간들은 대부분 예상 가능한 타이밍에 벌어졌다. 바람이 몹시도 불던 날, 버스정류장 앞 횡단보도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로의 눈을 마주한 채로 신호등의 불빛이 여러 번 바뀔 때까지 이어갔다. 북적거리는 손님들의 소란스러움이 가득 메운 어느 술집에서 그 소음에 이야기를 묻었다. 혹은 늦은 밤 너희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떠먹으며 달콤하고 시원한 맛으로 속을 진정시키며 겉으로는 기억을 뱉었다. 다양한 장면에서 너는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나의 결핍과 좌절과 불행이 온전히 나에게만 주어진 시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안고 있는 불행의 크기가 너무 크지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그리고는 때로 심각한 표정으로 때론 열정적으로 반응하며 너의 감정들을 달래주었다. 아니, 나의 감정들을 달랬다.
연기가 늘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몇 초간 응시한다. 그리고 뜸을 들인다. 음…이라는 말로 시작해도 좋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리고 옅은 미소. 지금의 이야기는 꺼내기 힘들지만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게 단련이 되었다는 투로 몇 개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나도 너의 기분을 이해해. 나도 너의 마음을 알아. 감히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도 상처의 기억들은 여전히 선명해. 우리 불행을 나누자. 그리고 행복해지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자꾸만 걸음을 멈춘다. 몇 걸음 걷지 못한 채 다시 하늘을 본다. 어둡거나 밝다. 그리고 괴롭다. 나의 위선과 가식을 마주한 것 같은 역겨움에 토악질이 날까 담배연기로 꾹꾹 눌러 담는다. 나의 불행의 온도는 아직 뜨겁지 않구나. 나의 불행의 무게는 아직 무겁지 않구나. 후 하고 내뱉은 연기는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데 나는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 하나도 기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도 아니었다.
가끔씩 너는 나를 찾았다. 우리는 똑같은 장면들을 반복했다. 우리의 불행은 사라지지 않는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고 그건 그대로 가끔씩 찾아와 나와 너를 괴롭혔다. 발버둥을 친다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로 인해 안도하는 나를 보며 과연 너도 나를 보며 안도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레퍼토리가 떨어질 때 즈음 자연스럽게 너와 나는 조금씩 멀어졌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서로에게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 혹은 더 이상의 안도와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거나 남은 감정이 없었을지도.
그래도 기억 속에 그 장면들은 흐릿하지만 분명히 남아있다. 분위기와 온도, 무게. 너와 나. 그때보다 우리는 지금, 조금이라도 행복해진 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