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면 연극영화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나의 정체성이었고 반쯤은 부끄럽고 수줍은 온도로 나머지 반쪽은 조심스럽게 오픈하곤 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오! 놀라는 분위기였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살면서 연영과 사람을 처음 마주했다며 신기하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가지 공통 질문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우선 꼽아보자.
“연영과에서는 뭘 배워?”
예술학부에 속한 다른 학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론 수업과 실기 수업으로 구분된다. 다른 학과와 마찬가지로 학년 별로 커리큘럼상 권장 수업이 있고 경우에 따라 필수 이수 과목도 존재한다. 이론이나 실기 한쪽으로 편중되어 학점을 이수하지 않도록 짜인 시스템이다.
이론수업의 경우 희곡 작품을 읽고 감상과 분석을 하는 과목이 있었다. 매주 정해진 작품을 하나 읽어야 했는데 단순히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텍스트 이면의 캐릭터의 감정이나 작품 전체의 메시지와 플롯 구성 등에 대해 분석했다.
고전 영화를 분석하는 비슷한 맥락의 과목도 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또는 연출가를 지정해 그의 작품들을 심도 있게 분석해 발표하는 수업도 기억에 남는다. 연극사와 영화사, 매니지먼트론과 같이 암기가 필수인 과목들도 있었다. 이전까지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유희의 목적으로만 바라봤다면 학과 수업을 통해 분석하고 감상하느라 본연의 재미는 반감되었지만 몰랐던 부분들을 발견할 때 느껴지는 새로운 즐거움도 있었다.
실기 수업의 경우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연극 연기와 영상 연기 수업으로 구분이 된다. 매주 이뤄지는 수업마다 발표가 이뤄지는 짧은 호흡의 수업과 한 학기 그 이상의 연속성을 가지며 수업을 진행한 뒤 작품을 무대에 올리거나 상영을 하는 것으로 종강을 하는 수업들도 있었다.
1학년 신입생들에게 필수 과목이었던 신체 훈련은 배우의 기본인 몸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게 목적인 수업이었다. 우리 몸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시작해 다양한 상황 또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연습실 한가운데에 선이 하나 그어져 있다. 우리는 설탕 결정체로 눈 앞에 있는 선을 넘게 되면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서서히 녹는 모습을 표현하는 액티비티이다. 그 외에도 꽃이 피어나는 과정, 알에서 깨어나는 병아리, 떨어지는 낙엽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까지 표현해내며 내 몸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장면 연기라는 수업에서는 매주 한 장면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영화 또는 연극의 한 장면을 연습해 발표하는데 흔히 생각하는 조별과제쯤이라 생각하면 된다. 두 조가 같은 작품 그리고 같은 장면으로 발표를 했는데 같은 대본을 가지고 발표하지만 다른 결과물에 매번 놀랐다.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방향과 온도가 달라진다는 점이 신기했다.
특히 교수님께서 발표 이후 각 발표자들을 따로 불러 혼자만 알 수 있는 미션을 준 뒤 다시 발표를 할 때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다른 긴장감이 생겨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짧은 순간 인터뷰를 통해 그 장면과 어울릴법한 유사한 감정을 끄집어낸 뒤 그 감정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미션을 하나씩 주셨다. 상대가 웃음이 터질 수 있게 해라, 혹은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으로 해라. 대사를 할 때 일부러 상대를 쳐다보지 마라 등등. 그렇게 마법을 부린 것처럼 장면의 톤이 바뀌어버린 장면을 발표한 뒤 수강생들은 돌아가며 장면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나중에 미션을 밝히는 방식이었는데 대사와 분위기를 봐서는 상상도 못 할 미션에 놀라기도 많이 놀랐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다.
영상 연기 수업의 경우 아무래도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았는데 연출 전공과 연기 전공이 팀을 이뤄 작품을 기획하고 촬영 및 편집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방향성과 메시지에는 서로 공감을 하지만 표현하는 데 있어 부딪치는 부분이 참 많았다. 그래도 같은 작품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이 결국 좋은 결과물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었기에 지나고 나면 아쉬움은 항상 남았지만 성취감도 그만큼 컸다.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추운 날 야외 촬영이었는데 따귀를 맞는 씬이었다. 여러 번 테이크를 가면서 뺨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어느 순간 손이 날아올지를 몸이 아니까 자꾸 먼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게 되더라. 그렇게 결국 30여 대의 따귀를 맞았지만 오케이 컷은 첫 번째 테이크였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까지 맞았어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감독님 보시기에 그 장면이 가장 베스트였다면 또 할 말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