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두 집 살림을 시작했다. 낮에는 주로 연습실로 출근을 했고 저녁에는 아나운서 학원에 갔다. 처음 상담을 하며 테스트를 받았고 우선은 종합반에 등록을 했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가장 친절한 원장님의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어쨌든.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나운서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미 본업을 하면서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아 수업은 대부분 저녁에 편성되어 있었다. 우리 반에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다는 친구도 있었고 주변에서 말을 잘한다며 목소리가 좋다며 아나운서를 도전해보라는 말에 다닌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체험해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다들 확신보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학원에 오게 된 것이 똑같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연기가 내 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기회가 주어졌고 그 무대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고민은 크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선에서 감각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모니터링을 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화면에 나오는 내 모습은 언제나 부끄러웠다. 연기는 보이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단점만 크게 보였다. 어색한 표정, 어정쩡한 행동, 인위적인 말투, 흔들리는 눈빛,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늘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나면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내 몫은, 내 그릇은 딱 그 정도라 생각했으니까.
아나운서 수업은 언제나 실습과 모니터링이 병행되었다. 처음에는 배우의 마음가짐으로 지켜봤다. 보기 싫었지만 수업의 일부이니까 어쩔 수 없이 똑바로 쳐다봤다.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눈은 왜 짝눈일까, 코는 왜 비뚤어졌을까, 인상은 왜 그렇게 쓰는 걸까, 입 모양은 왜 저러지 등등 자기 비하는 끝없이 이어졌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온도였다. 이 부분에서 표현력이 좋다, 발성이 잘 들린다, 문장의 연결이 자연스럽다는 식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내 눈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똑같은 화면을 보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었다. 여전히 부끄럽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는 게 어려웠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의 시선도 달라졌다.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외모의 단점들보다 내가 가진 장점들이 눈에 들어왔고 잘못된 부분들은 어떻게 바꾸고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부분은 이렇게 다시 읽어보자, 이 부분에서는 인상을 쓰지 말고 웃으면서 말해보자, 문장의 끝을 더 차분하게 내려보자. 나를 내가 다독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연극 연습에서도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기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나는 나 스스로를 비난하고 비하하고 무시하며 자신감과 자존감을 동시에 갉아먹고 있었다. 왜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을까라는 생각부터 이미 출발선이 다르기에 따라갈 수 없어, 라며 단정 짓고 단념했다. 거울을 바라보며 괴로워했고 내 선택을 후회하고 저주했다.
아나운서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한 것 역시 그 누구도 아닌 나였기에 마음속에는 부담감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내 선택이 잘못된 거라면 어쩌지. 나이는 계속 먹어가는데 나만 뒤쳐지면 어떡하지. 생각지도 못한 환대와 칭찬, 그리고 인정은 나를 춤추게 만들었다. 그 어떤 때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학원을 가는 게 즐거웠다. 특히 같은 고민을 가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마음에는 동질감과 함께 묘한 안정감이 생겼다. 그렇게 조금씩 아나운서 준비생으로서 젖어갔다. 큰 꿈과 희망을 가득 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