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고향"은 '하나'다.
잠에서 깨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구수한 된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방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에 일찍 눈을 떴다. 어김없이 엄마가 아침상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엄마」와 「고향」은 생각만으로도 숙연해진다. 고향은 대부분 태어나 자란 곳으로 떠날 때도 고향 뒷산에 묻히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힘들 때나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향이요 엄마다.
그만큼 고향과 엄마는 정겹고 포근하며 허물까지도 감싸준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주고 올곧게 다듬어준 고향과 엄마는 어쩌면 실과 바늘 관계인지도 모른다.
「‘고향’ 하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 하면 고향이 생각난다.
딸자식은 다 출가시키고
아들자식은 다 객지에 나가 살고
붙박이별처럼 홀로 고향을 지키시는 우리 어머니
어릴 때 살았던 고향 집이 생각날 때면,
선영들이 잠들어 있는 고향 산천이 그리울 때면,
어머니가 곧 고향이다. 고향이 곧 어머니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대부분 떨어져 생활하지만, 고향과 엄마는 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엄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천년만년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한 들 엄마의 자식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 또한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결코 식을 수가 없다. 엄마는 가끔 “애비가 애쓴다. 그저 건강해라. 애비가 건강해야 집안이 편안한 법이다”라며 걱정하신다. 그래서 엄마다.
어렸을 때 ‘엄마’는, 예순 중반의 나이에도 ‘엄마’라는 하나의 이름밖에 없다. 전화드렸다. “엄마! 잘 지내세요? 식사는 잘하고 계세요? 안약은 잘 넣으세요. 아프신 곳은 좀 어떠세요” 스마트폰으로 흘러나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내 가슴은 쿵쾅쿵쾅 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다는 얘기다. 그럴 때면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마음도 한결 가볍다. 아마도 이 세상 단 한 분뿐인 엄마이기에 그럴 것이다. 어느 가정의 자식이라도 마찬가지의 심정일 것이다.
1950~‘70년대 내가 어렸을 때 모진 가난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 3대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신 엄마다. 보일러나 전기가 귀하던 시절 온돌방이기에 아궁이 위치가 가까운 쪽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ㆍ엄마 그리고 우리 5남매가 한방에서 생활하던 시절도 있었다.
실내 화장실은 언감생심, 난방용 땔감도 부족해 저녁때만 되면 우리 형제들은 뒷산으로 등걸(죽은 나무의 밑동)을 찾아 나섰고, 엄마는 정미소(방앗간)가 가동되는 날이면 기계 소음과 먼지(탑세기) 속에서도 머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 빈 가마니에 왕겨(벼 껍질)를 있는 힘을 다해 꾹꾹 담아주시면 나와 동생은 등짐 지어 집 부엌으로 퍼 날랐다.
어쩌다 뒤 목으로 왕겨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껄껄(까칠까칠)하기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느 날은 뒷산에서 불쏘시개용 솔 걸(소나무의 마른 잎새)을 긁다 산 주인에게 들켜 잘못을 빌던 일, 한겨울에도 가족의 옷가지를 고무 다라 한가득 수북하게 담아 머리에 이고 옆 동네 포강(땅을 파서 지하수를 고이게 만든 우물)으로 누나와 함께 빨래하러 가시던 일 등을 생각하면 엄마는 그렇게 한 많은 세월을 사신 것 같다.
당신을 희생하며 가정을 일구는데 평생을 보내셨으니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 엄마가 지금은 그렇게도 즐기시던 TV 시청도 싫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언제나 하늘을 이고, 긴 밭고랑 김을 매시며 기도를 한다.
급행열차도 서지 않는 산골 마을 토담집에서 도시로 나간
큰 자식,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전히 어머니 안에 있는 어린아이로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웃음소리에 기다림의 행복으로 살고 계신다.
곡식이 익어 가는 계절의 소리
해 질 녘 돌아오는 작은 발소리
흙냄새 배어있는 어머니 모습
깊은 물소리 없이 흐르듯 어머니
깊은 마음은 자연만큼 편안하다. / 고향 집 어머니」
어느 날은 하얗게 희어가는 내 머리를 보셨는지 옛 생각에 젖어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애비 어렸을 때 배가 이~만큼 불러서 고생 많았었는데 벌써 할아버지가 되었네, 자식이 늙어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엄마가 오래 살아서 미안하다”라고 하신다.
구순(九旬)의 엄마도 아~이젠 정말 많이 약해지셨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메어온다. ‘머지않아 나한테도 닥칠 일인데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된다’라고 해도 엄마는 생각이 다르신 것 같다. 나이 듦이란 모든 사람이 공평한 일인데 날이 갈수록 울 엄마한테만 두 배로 더해가는 것만 같다.
엄마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나셨다. ‘여자는 언젠가 공부를 멈추어도 된다’라는 우리 사회 통념을 깨고 그 옛날 고등학교를 마치신 분이다. 기억력과 손편지 쓰시는 건 지금도 여전하시다. 정신이 늙지 않으면 몸 건강도 함께 따라온다는데 그렇게만 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목민심서의 ‘다산 정약용‘은 혈육이었던 형님(정약전)이 세상을 떠나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다. 사람에게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그렇게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도 했다.
가족 중에서 형님의 죽음으로도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엄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일 것이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해도 바람이 놔두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해도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효도”라고 하는데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엄마는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숭고한 이름 ‘엄마!’ 엄마한테만은 “건강도ㆍ세월도” 이 세상 흐르는 모든 것은 엄마와 함께 멈춰 줬으면 좋겠다.
이젠 여행도 귀찮다고 하시지만,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엄마를 설득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손주와 증손주까지 합치면 24명이다. 가능할까?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아름다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