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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E Sep 01. 2021

간병하는 마음, 간병받는 마음

하루라도 더


할머니는 처음부터 치매가 아니었다.

처음은 허리 압박골절로 일어나지 못해 누워계셨고, 수술해주는 병원을 찾지 못해 몇 달 동안 병원만 다니시며 낫는다는 희망과, 수술 못한다는 의사에 말에 절망을 반복적으로 느끼며 살고 있었다.

그 사이 할머니의 통증은 계속되었고, 화장실조차 가지 못해 기저귀를 차야 하셨지만, 할머니께서 계속 거부하셨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용변을 받았는데, 할머니는 눈치가 보이 신지 소변이 나올까 물도 거의 안 드시고, 음식도 거의 드시지 않아 대변도 보름 넘게 참으셨다.

그렇게 한두 달쯤 지났을까..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셨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니, 뇌졸중이 와서 치매가 왔다고 한다

정말 하루아침에, 할머니가 나를 잊어간다.


할머니가 치매에 진단된 직후부터 가족들은 매일매일이 시행착오였다.

기저귀 가는 법도 몰라서 이 방법, 저 방법 써가며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식사드리는 것도 입맛이 확 바뀌셔서 무엇은 드실까, 무엇은 안 드실까 끼니때마다 바꿔가며 찾아갔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웅얼웅얼하시며 무엇하나 제대로 말을 뱉지 못하셨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자 결국 화도 내시고, 답답해 소리도 지르셨지만 할머니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는 일이 태반이었다.

가뜩이나 허리 수술하셔서 누워서만 지내셔야 하는데, 필요한 걸 말씀하셔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니 화가 많아지셨다.

치매가 오고 나서는 여기가 어딘지, 자식들 이름은 뭔지는 물론이고 물 한잔 달라는 말씀조차 그 '물'이란 단어를 기억 못 하셔서 이거, 저거, 그거 이렇게밖에 말씀을 못하셨다.

처음 진단받으셨을 때가 제일 몸이 안 좋으셨는데, 가족들 모두가 할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혹여 말이 씨가 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절대 요양원은 못 보낸다는 마음은 하나여서 집에서 돌아가면서 할머니 간병을 하고 있었다.

나 또한 직장인이기에 평일에는 회사일을 하고, 주말에는 할머니 댁으로 가서 주말 내내 간병을 하는 삶을 살다 보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몸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더라.

처음엔 할머니 살리고자, 아픈 거 낫게 해 드리고자 온 식구들이 거동조차 못하시는 할머니 모시고 병원을 다니고, 그마저도 치료해줄 수 있다는 병원이 없어서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치매는 완치가 없다지만 그래도 아픈 허리와 어깨는 나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할머니의 나이 때문인지, 수술하셔도 낫지 않는 허리와 아직 수술하지 못한 어깨 때문에 수많은 병원을 다녔다.

허리 때문에 일어날 수 없으신 거였는데, 할머니는 치매까지 와서 걷는 법을 잊어버리셨다.

처음엔 더 이상의 진행이라도 막아보고자 색연필이며 스케치북을 사다가 같이 그림 그리고 글씨도 써보고 하였지만, 그마저도 앉아있는 게 힘들어 5분도 안돼서 누워버리셨고, 약 먹어도 안 낫는다고 소용없다며 드린 약을 던지거나 입에 넣어드려도 뱉어버리셨다.

간병을 하면서 제일 힘든 것은 간병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기저귀 가는 것, 식사 챙겨드리고 심부름하고 이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시간이 아예 없어진다는 것이 제일 부담이 컸다.

평일에는 하루에도 열몇 시간씩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간병을 하니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할머니가 안 아프셨을 때에는 주말마다 할머니 집을 가는 건 똑같았지만, 그때가 참 행복했다.

퇴근하고 가면 나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밥을 해놓으시고, 국을 끓여놓으시고 도착하자마자 우리 아기 밥 먹어야 된다며 상을 차려다가 갖다 주셨다.

허리 아프니까 내가 하겠다고, 쉬시라고 해도 힘들게 일하고 왔으니 쉬어야 된다며 기어이 할머니가 다 해주셨다.

이제는 그 상황이 바뀌었다.

할머니가 아프면서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이 다리는 빼빼 말라갔다.

손가락에도 힘이 없고 일어나는 방법조차 모르셔서 할머니를 일으켜드리고, 식사를 차려 쟁반에 가져갔다. 숟가락을 들려드려서 떠먹여 드리고, 짜게 먹으면 안 되니 식사량을 조절해드려도 무조건 김치를 한주먹씩 드시고 고기도 비계만 골라서 드신다.

할머니 몸을 위해서 골고루 드셔야 하지만, 다른 반찬 놔드려도 안 드시고 김치만 한주먹씩 드셨다.

두부나 계란은 싫어하시고, 돼지고기도 수육을 삶아다가 드셔야 하는데, 기름진 부위만 골라 드시니 답답하다.

단백질을 잘 드셔야 근육이 좀 붙어서 운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운동은 누워서 옆으로 도는 것뿐.

자세를 바꾸는 것만 겨우 하실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할머니 곁에서 신생아처럼 사고 날까 갑자기 무슨 일 생길까 하루 종일 지켜봐야 하는데,

게다가 의사소통도 되지 않으니 더더욱 옆에 붙어서 지켜봐야 한다.

식사 준비하려 잠시 집 앞 마트라도 다녀올 때면, 혼자 있는 불안감에 가지 마라 어디 가냐 눈물 글썽이며 잡으시고, 겨우 다녀오면 길어야 30~40분쯤인데도 왜 이렇게 늦게 왔냐 화내신다.

아무래도 병원에 혼자 계셨던 시간이 자식들에게 버려진 걸까 두려우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식사를 다 하시고, 쟁반을 대충 싱크대에 올려놓고 이제야 내가 밥을 먹는다.

언젠가, 너무 힘들어서 할머니를 방에 눕혀드리고, 나는 반대편 방에 틀어박혀서 운 적이 있다. 할머니의 병이 너무 서러워서, 이전의 행복했던 할머니와의 시절이 그리워서.

입을 틀어막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울음소리가 새 나갔나 보다.

할머니께서 방에서 소리치셨다.

"갠찮해! 울지말어! 갠찮해!"

눈물 섞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울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가서 괜찮다고, 안 운다고 할머니를 진정시켰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보시며 나의 상태를 살피셨다. 아무것도 모르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 알고 계셨다. 다 기억하고 계셨지만 말씀을 못하셨던 것뿐이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날 더 신경 쓰셨다.

아프셔도 투정 안 하시고, 통증을 참으셨다.

다시 식사량이 줄었다. 물도 거의 드시지 않는다.

기저귀를 갈고자 하여도 괜찮다며 극구 말리셨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할머니는 감정적이라 알려드린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의 감정을 신경쓰니니,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그 뒤로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왜 이것밖에 안 쌌냐, 참지 마시라 하며 웃으면서 장난치고, 대변을 보시면 더 싸야지~하면서 장난을 쳤다.

식사를 하실 땐 많이 먹어야 많이 싸지 하며 더 드실 것을 권유했고, 기저귀 가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말씀을 자주 드렸다.

휠체어에 타시는 것도 내가 손목이 아프니 한걸음만 할머니가 걸어보자고, 손잡아드릴 테니 할머니 힘으로 해보라 하며 잡아드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변해갔다.

식사도 드시고 싶은 것 많이 드시고, 매일 조금씩 운동을 하시니 근육도 많이 늘어 더 건강해지셨다. 할머니의 몸에 힘이 생겼다.

누워서 손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하시던 분이, 이젠 혼자서 휠체어를 타시고, 다시 침대에 오르신다.

손을 잡아드리면 거실 한 바퀴 빙 돌아 걷기도 하신다.

모든 것이 매일, 조금씩 하나하나 실천해 온 성과이다.

내일의 할머니는 조금 더 건강하시기를.

하루라도 오래 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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