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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미리내 May 11. 2024

여행은 칠십부터  6

한밤의 대피훈련

우리 엄마는 겁이 참 많다.


허리사이즈는 32가 넘어가고, 생선 대가리를 식칼로 탁탁 내리치며 깔끔하게 손질하고, 쌀 10kg쯤은 여전히 너끈하게 머리에 이고 5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팔씨름으로 나를 이기지만 엄마는 겁이 참 많다.


처음 여행을 계획한 후에는 뉴스에서 여행 중 다치거나 사고를 당한 소식만 내내 되씹으며 걱정을 사서 하더니 기어코 여행 중에 일이 터졌다.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 프랑스 최고 휴양지라는 안시로 1박 2일 짧은 교외여행을 앞두고 단잠을 자던 새벽녘에 화제 알람이 울렸다.

울렸다 끊기고 울렸다 끊기는 매미 소리 데시벨의 알람 소리는 누가 들어도 오작동임이 분명했지만 엄마 귀에는 공습경보와 같은 무게였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 잠결에 들리는 알람을 자장가 삼아 잠을 이어가던 나는 불을 켜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엄마덕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평소엔 참 작던 엄마의 눈은 말 그대로 500원짜리 동전만큼 커져서는 어느새 옷에 가방까지 야무지게 둘러매고 한 팔엔 내 옷가지를 가득 들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엄마, 이거 오작동이야. 좀 있다 꺼질 거야"


" 나가자! 알람 울렸잖아"


"불났으면 사람들이 깨우러 다녔겠지. 그리고 여기 2층이야. 불나면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돼"


아무리 침착을 넘어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해도 엄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입던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치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역시나 오작동임에도 일단 울린 알람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면서 사람들이 꽤 모여있었다.

호스텔이라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다수였는데, 새벽 소동에도 그새 틴트를 발라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입술로 즐거워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겁먹은 부엉이처럼 두 눈을 번쩍 뜨고 앉아있는 엄마는 시트콤 속 주인공 같았다.


                                                            엄마 눈이 이렇게 컸다고?


별다른 일없이 다들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안시행 테제베를 타는 날로 안 그래도 일찍 일어났어야 했지만 새벽 3시는 내 계획에 없었다.


놀란 가슴에 더 잘 생각이 없어진 엄마는 3시 반에 여행준비에 들어갔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닌 것도 같은 상태로 침대를 사수하던 나도 결국 새벽 5시, 첫차가 다니기도 전에 역으로 출발했다.

     저러고 맞은편에서 기다리는데, 새벽 4시라고 잠이 오겠냐고 


멋지게 베레모를 챙겨 쓰고, 아까의 소동에 쓸어내린 가슴에 커피와 샐러드, 샌드위치와 마카롱을 야무지게 채워 넣으며 안시로 기차여행을 시작한 엄마는 창밖 풍경을 즐기면서  새벽 소동에 대해 전화로 한바탕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새벽에 알람이 울리고 난리가 났잖아, 얼마나 놀랐던지. 내가 또 잽싸잖아. 얼른 옷 입고 지갑이랑 짐 딱 챙겼는데 , 쟤는 세월아 네월아 뭉그적 거리고 누워있기나 하지. 여차하면 침대 시트 딱 벗겨가지고 창문에 묶어서 1층으로 내려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


천하에 게으르고 안전불감증에 뭉그적거리는 딸내미가 챙겨주는 주스를 마시면서 엄마의 무용담은 어째 점점 사이즈가 커져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엄마는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앓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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