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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초량 Dec 09. 2023

한 번이라도 예전처럼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고 있던 책방지기님의 게시물을 봤다. 은희경 작가님 사인이 담긴 책의 사진. 그걸 보고는 뜬금없게도 ‘나도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는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도 있었는데. 책을 좋아하던 시절이. 책이 좋고, 좋아하던 작가도 있고, 감정에 충실하던 시절이. 그러면 뭐 해. 지금의 나는 마음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십 대에는 부정할 수도 없이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성적에 관한 불안으로, 이성에 관한 고민으로, 친구 관계에 대한 걱정으로, 그리고 책과 글을 향한 열정으로. 책을 읽는 시간과 글을 쓰는 시간만이 나를 버티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십 대에서 도서관은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그 시절 썼던 일기를 다시 들춰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장소도 도서관일 것이다. 이제는 다 버리고 없지만. 도서관에서 안정감을 찾던 나.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정체성을 붙잡으려던 나.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 같아서 책 속으로 도망치려 했던 나.


책을 읽고 나면 속이 말로 가득 찼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은 손을 타고 글이 되어 나왔다. 쓰고 또 쓰고.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어가는 줄도 모른 채 글을 썼다. 일기장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공책이 생겨났다. 지금의 나는 그 기록 모두를 사랑할 수 있지만….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아니었기에. 그것에 담긴 우울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글을 쓰던 나는 없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일기장을 모두 버렸다.


그때부터였다. 정확한 시점도 기억한다. 재수를 다짐한 그날.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되뇌었다.


‘없어. 이제는 없어. 우울에 사로잡혀서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고 땅굴이나 파니까 망한 거야. 이제 그런 나는 없어. 아무것도 느끼지 마. 마음에 담지 마. 생각하지 마. 잊어. 지워.’


애썼다. 재수 학원에 다니면서 내내 지우려고, 전과는 달라지려고. 남들이 보기엔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재수를 기점으로 나의 내면은 크게 달라졌다. 말도 못 하게 예민한 아이는 무뎌지고 둔해졌다. 끓어 넘치던 감정이 모두 식어버린 듯했다. 책을 읽고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글을 쏟아내던 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전처럼 느낄 수 없고 마음에 담을 수 없고, 전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의 둔함을 깨닫지도 못한 채 살아가다가 그냥 문득 둔해졌다는 걸 알았다. 상관은 없었다. 당장 살아가기 바빴으니까. 눈앞에 해치워야 할 일이 잔뜩 있었으니까.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렇게 살았는데. 그랬는데.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많이 그리워한다. 밤새도록 글을 쏟아내던 나를 절절히 그리워한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예전처럼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전과 달라지려고 애쓰지 않았어도 결과는 똑같았을까? 나이가 들면 스러질 불꽃이었을까?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덜 슬플 텐데. 내가 억지로 꺼트린 것이 아니라면 덜 아플 텐데. 그때 썼던 글이라도 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시 떠올려 볼 수 있기라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때는 뭐가 그리도 견디기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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