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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통 Oct 14. 2021

어느 염세주의자의 폭주

저와 같이 리밋 없이 딥 다크 해져보시겠어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벤츠는 한번 몰아봐야 하나.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든 생각이었다. 옆 차선에 벤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우디랑 BMW는 타봤는데 벤츠는 아직이다. 지나가다 모르는 사람 차 내부를 본 적은 있는데 좋아 보였다. 승차감이 좋을까? 하차감이 더 좋겠지. 부러움의 시선으로 샤워를 하는 기분이려나. 사실 차는 쥐뿔도 모른다. 면허도 없다. 관심도 욕심도 가져본 적 없다. 그저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나의 불행의 원인이 벤츠의 부재에 있는 것인지 잠시 의심해 보았을 뿐이다. 모르겠다. 우울은 늘 공기처럼 곁에 있었고 불안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왜 그럴까.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은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딱히 벤츠를 갖고 싶은 건 아니다. 벤츠를 살 정도의 경제력이 있다면, 매일 불안에 헌납하던 나의 시간과 정력을 되찾아 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잘 모르겠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면 더 이상 물질은 행복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슨 통계도 있었다. 연소득 7,000만 원을 경계로 더 이상 수입이 행복에 비례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7,000만 원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내 느낌 상 저 정도의 액수였다. 이 통계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통계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연소득 7,000만 원이 넘는다고 해서 돈에 초연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고 더 많은 부를 쌓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 통계에는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연소득은 중요하지 않다. 물고 태어난 수저 색깔이 더 중요하더라, 이것이 불혹을 앞둔 한 중년 여성의 깨달음이다. 뭐 수저 색깔도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신의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의 크기는 신께서 랜덤으로 하사하는 것 같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대답이 있다. 행복이 뭐냐는 질문에 방송인 홍진경 씨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상태’라고 했던 것이다. 정말 띵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태는 현 육만전자(칠만전자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의 부회장 이재용 씨 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라고 생각한다. 돈이 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돈도 없지만, 행복을 담는 주머니도 잃어버린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말했던가. 인간은 생각을 하면 우울하다. 우울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운 좋게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유복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한들 주위를 둘러보라. 나는 백화점에 가면 마음이 무겁다. 우리 경기가 언제 호황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철든 이래로 역대 최악의 경기 수준이라며 언론은 매일같이 떠들어 대는데 백화점 사전에는 불경기란 없는 것 같다. 없어서 못 판다. 이름 좀 들어본 브랜드는 몇 시간을 대기하지 않으면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수백만 원짜리 물건을 산 사람이 승자다. 돈을 내겠다는 사람은 지천에 깔렸다. 쇼핑백을 양 팔에 가득 걸고 분주히 매장을 도는 사람들 사이로 이질적인 공기가 드문 드문 느껴진다. 백화점 간 배달을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고단한 얼굴이다. 건 당 몇 천 원을 받고 물건을 배달하는 일은 노인들밖에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동할 때 드는 차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어서란다. 조선에서는 고령자 지하철 운임이 무료이므로 소일거리로 백화점 퀵 업무를 하는 노인 분들이 있는 것이다. 돈이란 무엇인가. 왜 누군가에게는 너무 가볍고 다른 누군가에겐 한 없이 무거운가.


토마 피케티의 R> G


, 자본수익률> 경제성장률이 틀리다고 말할  있는가. 자본이 없는 자에게 미래가 있는가. 소득이 행복에 비례하지 않는 다는 말이 맞다고 쳐도, 절대빈곤은 예외다. 지구에서 절대빈곤은 사라졌나. 그렇다면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가.


탈레반에게서 도망치려 날아오르는 비행기에 매달렸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보면… ‘신은 죽었다라던 니체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9.11 테러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들은 20년이 지나도록 추모되지만, 미국의 보복 테러로, 혹은 내전으로 스러진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죽음은 일상이다. 특별할 일도 아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진 미군들도 너무 불쌍하다. 개인적으로는  결정을  정치인들 본인들이 전쟁터 최전선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죽어도 되고 누군가는 절대로 죽어서는  된다. 모두의 목숨 값은 다르다. 인간은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나는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 하고, 절대로 주변을 둘러봐서는 안된다. 주변을 둘러봐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주변에 관심을 끄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에게만 집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나마 행복하게 살더라. 하지만 어쩌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불우한 이웃의 불행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 다행이라 느끼며 행복해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은 세상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가. 세상은 나아졌을까. 전체적인 삶의 수준은 나아졌지만, 부조리함은 복붙 해서 옮겨놓은 듯하다. 오히려 향상된 인권, 부르짖어지는 평등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더더욱 고독할 것이다.


랜덤으로 행복 주머니가 배정된 인간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이다. 우리 모두가 ‘역세권’에는 살지 못해도 ‘저승세권’에는 살고 있다. 고층에 산다면 집에서 바로 뛰어내릴 수도 있고, 아니면 가까운 차도로 뛰어들 수도 있다. 집에서 회사 가는 길보다 저승 가는 길이 더 가깝다. 하지만 세상은 자살을 죄악시한다. 어릴 때 누군가 그랬는데.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지옥에 가면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죽지도 않고 계속 몸이 타고 있을 것이라 했다. 왜 그런 끔찍한 저주를 퍼부으며 유일한 탈출구까지 막는 걸까. 자살 예방은 과연 자살을 희망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남겨진 사회를 위한 것일까. 사회가 혼란해지면 남은 사람들이 곤란하다. 그래서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퇴로조차 차단하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데. 희망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빛을 되찾아 줄 능력도 의향도 없으면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는… 인간은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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