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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통 Oct 15. 2021

금요일의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

마지막에 웃지 말고 많이 웃자

월요일의 우울함과 금요일의 그것은 다르다. 월요일에는 모두가 우울하기 때문이다. 단톡방에서 심한 욕설이 오고 가면 상대적인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금요일의 우울은 고독하다. 불금과 Friday를 외치는 군중들 머리 위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맥주가 떠다니는데 나의 세상에서만 비가 내린다.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 끼얹고 싶지 않아 홀로 우울함을 소비한다. 어렵게 주말을 맞이해도 또 월요일은 찾아오는 것을. 허무하고 무의미하도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내가 나를 정의하기로는 그러한데, 남들의 눈에는 ‘호구’ 또는 ‘만만한 사람’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거절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남편은 나에게 미움받기 싫어하는 욕심쟁이라고 했다. 욕심쟁이라니… 늘 내가 더 갖느니 손해 보는 쪽을 택해왔는데… 타인의 마음을 욕심냈다는 면에서는 욕심쟁이 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예수의 아가페도 아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다. 나쁜 머리로 열심히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했고 내가 바란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 받았다. 크게 뒤통수 맞은 적은 없지만 Giver에게 친절한 세상도 아니다. No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는 항상 무리한 요구를 받았다.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부탁 못할 텐데.’


자업자득이다. 나만 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싫은 걸 싫다고 말을 못 하지. 용기를 내서 싫다고 말하면 긴장한 탓에 말투가 경직되고 미안한 마음에 말이 길어진다. 그렇게 거절하고 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신경 쓰인다. 그렇게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고 나면 ‘그냥 하고 말걸’이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Yes맨이 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나 자신이 너무 싫고 변하고 싶었다. ‘미움받을 용기’를 여러 번 읽으며 변하려고 애썼는데, 나도 이제 늙었는지 변화가 너무 어렵다. 주변에 말을 해봐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만이 돌아올 뿐이다.


‘넌 왜 그러고 사니?’


나도 모르겠다. 구제 불능의 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라도 이해해 줘야지. 더 이상 나에게 변하라고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직도 가끔 나를 보며 울컥한다. 친구들이 말하는 고구마 100개 먹은 기분, 나 스스로도 느낀다.


‘Love yourself.’


 BTS조차 나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했다.


오늘도 무리한 부탁을 하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무리한 부탁이었기에 여러 번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게 스트레스라 결국 내가 손해를 보고 또 부탁을 들어주고야 말았다. 금전적인 손해는 잠시일 뿐이다. 오히려 그게 낫다. 하기 싫은 일을 요구받으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내 정신의 주인은 내가 아니게 된다. 코끼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난다고… 벗어나려 애쓰면 애쓸수록 사로잡힌다. 나는 왜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닐까. Yes라고 말하든 No라고 말하든 결국 내 하루는 엉망이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최약체를 감지하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나의 약함이 잘못이다.


헨델의 메시아를 틀었다. Holy 한 기분이 된다.

우주에 관한 책을 펼쳤다. 심오한 내용이다.

창백한 푸른 점. 그 코딱지만 한 점 속에서 국가를 나누며 다투고, 그 코딱지 오브 코딱지인 대한민국에서 정상이 되겠다고 다투고… 그 정상의 다툼이랑은 하등의 관련도 없는 수도권 어드메 지역에서 호구됐다고 울부짖는 나. 하찮다. 나도 우습잖고 나를 호구 잡는 이 작디작은 세상도 우습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과거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인간만이 느낀다고 하는 ‘후회라는 감정이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를 구분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그걸 그때의 나는 저질렀다. 그건 내가 아니다. 나라면 절대 그런 행동 하지 않는다. 그건 누구인가?


우리의 세포는 끊임없이 탈각되고 새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뇌도 시냅스가 어쩌고 저쩌고… 어릴 때는 모두가 천재였지만 시냅스가 가지치기하는 과정에서 일부 천재를 제외하고 모두 범인(凡人)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은 눈으로도 가끔 확인할 수 있다. 이태리타월로 몸을 밀면 가래떡 같은 때가 나오기도 하고, 각질 제거제로 얼굴을 문지르면 쌓인 각질이 분리되지 않는가. 겨울이 되면 몸에 하얀 각질이 일어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이불에서 일어나는 순간 각질보다 작은 분자와 원자가 나의 몸에서 폴폴 떨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나와 접촉하는 공간 또는 접촉하지 않는 공간에까지 나의 흔적을 사정없이 남기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시시각각 나의 몸의 일부에서는 무언가가 사라지고 생겨난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몸의 ‘일부’를 공유하는 비슷한 사람일 뿐, 같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1분 전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몸의 99.9999999999%를 공유하기에 가치관이나 생각의 차이가 별로 없다면, 1년 전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나는 그보다 더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 태어났기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후회’라는 감정도 이해가 된다.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많은 기억과 대부분의 몸을 공유하는 ‘어떤 녀석’이 저지른 일이고 떠올린 생각이다.


이렇게 길게 나의 개똥철학을 나불거린 이유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다. 오늘 약속한 그 ‘하기 싫은 일’, 내가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었다. 나와 아주 비슷한, 또 다른 내가 해야 할 일일 뿐. 오늘, 2021년 10월 15일 9시 43분 33.xxxxxxxx초에 존재하는 나는 이전에 존재한, 이후에 존재할 나와는 다른 생물인 것이다.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나 미래의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나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호구이자 남을 배려하는 평화주의자인 그제의 나에게서 온 선물이 있다. 이솝의 블렌드 오일이다. 이솝 매장에 가면 늘 나던 향으로 내 취향이었기에 그제 주문했고 어젯밤에 도착했다. 당장 개봉해서 오일 버너에 태웠다. 절간 냄새 같기도 하고 숲을 연상시키는 그 향은 나의 후각을 즐겁게 했다. 오전 8시의 나에게서 온 선물도 있다. 배달 주문한 커피와 다쿠아즈다. 씁쓸한 아메리카노와 달짠의 극치인 소금 다쿠아즈가 나의 혀를 기쁘게 했다. 그럼 이제는 나의 귀를 행복하게 해 줄까 한다. 5년 전의 나에게 받은 선물인 브리츠 CD 플레이어에 글렌 굴드 피아노 연주 CD를 넣었다. 오늘의 초이스는 바흐의 평균율이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일정한 선율이 귀를 간질인다. 역시 음악은 CD로 들어야 제맛이다. 한 단계 좋은 스피커를 주문해서 고생하는 나의 귀를 좀 더 호강시켜줄까 고민한다. 이는 차주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쌀쌀해진 날씨에 걸치고 있는 이불이 포근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행복 비슷한 기분을 잠시나마 느낀 것도 같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브런치라는 공간도 맘에 든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내일 일은 집어치우고 현재 나의 오감을 만족시켜주기로 한다. 파아란 가을 하늘이 보기 좋다. 높아서 더 만족스럽다.


몇 년 전에 통역 일로 간 행사에서 연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가상화폐 투자 회사였던 것 같은데, 그 대표의 스피치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삼국지를 언급하며, 조조랑 손권, 유비가 박 터지게 싸웠지만 결국 마지막에 웃은 것은 사마의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사마의가 되자고 했다.(ㅋㅋㅋ)


그런가. 사마의가 위너인가. 위너의 의미가 뭘까. 삼국지 내용은 일부 픽션이라지만, 삼국지가 모두 논픽션이라는 가정 하에 생각해봤다. 유비의 말로는 비참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너무나도 유능한 5호 대장군이 있었다. 바람의 방향조차 바꾸는 제갈량이 있었다. 그에 비해 사마의는 별로 삼국지에 나오지도 않고 영웅들이 번아웃 왔을 때 줍줍한 영토로 천하 통일하긴 했지만 너무나 존재감 없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위너인가. 유비의 인생이 더 즐겁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웃는 놈 아닌 자주 웃는 놈이 승자란다. 애초에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그 소수에 끼려고 아등바등 살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웃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많이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금요일의 우울한 나를 위로해 본다. 정신 승리라고 말해도 할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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