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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통 Oct 22. 2021

우리는 모두 타짜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인생은 도박의 연속이다

최근에 나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다. 착하다는 말을 평생을 듣고 살았다. 나는  말이 싫었다. 나는 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양보하고, 손해 보면서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착한 행동 공짜가 아니었다. 대가를 바랐다. 나도 양보받고 배려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 정말 착하다라는 말로 나의 ‘배려 대한 값을 지불했다. ‘ 나만 항상 손해 봐야 하지?’ 손에   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면 배는 피곤했다. 부자연스럽게 화를 내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하고 나면  자신을 자책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나와 같은 성격을 ‘예민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렇군. 나는 예민한 사람이었군. 누구보다 털털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정체성을 찾은 것처럼 반가웠다.


생각보다 ‘예민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예민한 성격에 대해 해설하는 유튜브에 달린 댓글을 보면 그랬다. 하지만 동류가 많다고 해서 나의 불편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심하고 배려 없는 친구 관계는 끊을 수 있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는 내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운명처럼…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편함을 참는 대가로 우리에게 월급이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편함이 월급의 효용을 넘어섰다 느꼈고, 나는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프리랜서로 진행하고 있는 여러 일 중 하나의 일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나의 일을 지지하고 응원해줬던 사람 중 한 명인 엄마에게 말을 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말을 꺼냈다. 1년 여의 고통받고 고민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런 이유로 나는 이제 이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해.’


‘나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어서 이제 이 일이 재미없어. 계속 이 일을 하면 불행할 것 같아.’


‘세상에 일이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 어딨니? 다들 힘들어도 참고 하는거야.’


이 이후로 엄마의 저주가 이어졌다. 내가 일을 그만둘 경우 불행해질 나의 노후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안 그래도 고용 형태가 불안한데 벌 수 있을 때 벌어 둬야 한다느니, 씀씀이도 헤픈데 수입이 줄어들면 어떻게 할 거냐느니, 노인이 되어 돈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줄 아냐느니… 나를 설득하기 위한 근거를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당연히 지출도 줄일 거고, 남는 시간으로는 내가 행복한 일을 찾고 싶어. 불필요한 물건만 사지 않으면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러자 엄마는 얼마 전에 본 ‘미운 우리 새끼’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그래. 개그맨 서남용처럼 살면 그렇게 살아도 되겠다. 기초소득으로 유통기한 7년 지난 라면이나 먹고 옥탑방에 살면서.’


나는 그 프로그램을 안 보는데 마침 엄마랑 한바탕 말싸움을 끝내고 나자 TV에서 미운 우리 새끼 재방송을 했다. 나의 노후의 모습이라는 서남용 씨 편을 유심히 봤는데 옥탑방이라 해도 서울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 집도 컸다. 무엇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상관없이 서남용 씨는 행복해 보였다. 소아암 환우를 위한 모발을 기증하기 위해 긴 머리를 유지하는 모습도 배달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소신도 굉장히 멋있었다. 편견으로 남을 무시하는 엄마가 미웠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에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전해졌지만, 나의 현재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아 슬펐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 나의 저녁은 씁쓸한 알코올에 잠식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엄마의 말도 맞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지 못해 일을 한다. 나의 친구들도 ‘대출금 때문에’, ‘아이 때문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대출금도 아이도 없지 않은가(집이 없기에 대출금도 없다). 나의 현재를 희생해야 할 이유가 있나. 물론 나이가 들면 지금처럼 건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병에 걸리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알고 있다. 엄마 말처럼 더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일을 하고 싶어도 써주는 곳이 없을 것이다. 지금 열심히 모아야 나의 노후를 책임질 수 있다. 아이가 없기에 아이에 대한 책임은 없으나, 나의 노후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아이가 있다 한들 노후를 공동 분담해주지는 않겠지만). 나중 일은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느냐, 미래에 노인이 된 나를 부양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느냐. 정말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확률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평균 수명 언저리까지 살 가능성이 더 높겠지? 하지만 무슨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면 100%다. 나에게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지인 중에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짧은 생을 끝낸 사람도 몇 명 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해도 될까. 사실 행복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다. 뭔가를 성취했을 때,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느끼는 행복은 내가 얻고 싶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추운 날씨에 전기장판 위에서 먹는 귤 같은 즐거움은 내가 만들 수 있다. 그런 오감을 만족시키는 행복의 순간들로 인생을 채우고 싶었다. 도저히 빠지지 않는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일을 내려놓고 싶었다. 즐겁다가도 그 일이 떠오르면 물에 젖은 솜처럼 기분이 축 처지고 무거워졌다. 오감 만족은커녕 오감 불만족이다. 하지만 맘에 드는 디퓨저를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안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멋진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눈앞에 놓인 현재의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 ‘타짜’에서 손모가지를 거는 모습을 보며 자극적이라 느꼈지만,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우리의 인생을 건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정적으로 저축을 하며 ‘나는 모험은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나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저축을 할 것인가. 그는 ‘내일이 있다’는 것에 ‘(저축한 돈으로 오늘 누릴 수 있는) 쾌락’을 건 모험을 한 것이다. 만약 그에게 ‘내일’이 없다면 그는 게임에 실패한 것이 된다.


정답은 없다. 누구나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뿐.

다만 판돈이 ‘나의 인생’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로지 나의 판단으로 선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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