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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중재 May 11. 2024

<서울의 봄>을 본 후

이야기의 주인공, 영화와 트렌드, 기획에 대한 단상

2024.05.11. #서울의봄 #기록


1.

영화를 보면서 <작전명 발키리, 2009>가 많이 겹쳐 보였다.

이미 스포된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긴장감을 유지하고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내는 플롯의 방식 등이 그랬다.

아마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비슷하게 풀고자 했던 기획이 아니었을까.

<남산의 부장들, 2020>을 필두로 <서울의 봄, 2023>까지...

굵직한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 하이브미디어코프의 <하얼빈>도 무척 기대된다. 


2. 

이야기라는 광의적 정의에서, 그중 하나인 ‘영화’는 본질적으로 뜨거운 속성을 지녔다.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적 해소의 부분이 대체로 뜨겁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누가 뭐래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말이라 생각한다.

결말은 ‘카타르시스’를 포함하고, 절정과 해결을 통해 주인공이 변화하며 

주인공의 입체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관객의 공감과 연결된다.

관련해서 세 가지 정도가 생각난다.


- <서울의 봄>을 이끄는 주인공,

-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트렌드의 한계,

- 창작자들에게 기획이란.


2-1.

<서울의 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모두가 응원하던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누가 봐도 나쁘다고 욕하고 침 뱉을 전두광?


사실 관객들에게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주인공이란 존재는 만드는 사람에게 더 중요하다.

주인공이 창작자가 초심 그대로 진실되게 창작을 마무리하기 위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히려 끊임없는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부분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이 누구인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창작자들도 생기고 있다.

현대에 창작되는 작품들이 교묘하게 주인공을 숨기고, 

그 역할을 때론 여러 인물들에게 나눠주기 때문에 주인공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작법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그런 면에서 정답은 없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이태신이라는 인물의 가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주인공인가?

극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 

그 변화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증명하는 단 하나의 인물이 ‘주인공’이다. 


어떠한 이야기에서 관객들이 응원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논리라면

사실 <서울의 봄>에서는 이태신일 것이다.

모두가 제발 그가 전두광의 군사반란을 막길 바라고 응원한다. 

반면 전두광은 악인이다.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운영하며 자신의 야욕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결국 그 목적을 이룬다. 

관객들은 그가 실패하길 바라지만 그저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악인이었을 뿐이다. 


여담이지만 빌런과 적대자, 안타고니스트는 다른 개념이다.

‘나쁜 사람 = 빌런 = 적대자’가 아닌 경우들도 많다. 


전두광의 쿠데타 계획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측면에서,

피카레스크 형식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있다. 

관객들이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응원하게 만들도록 판이 짜여 있음에도,

이태신보다 전두광이라는 인물에 더 입체성을 부여한 것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한 인물에게 주인공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 역할들을 여러 인물들에게 분배하는 흐름들이

현대 작품들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 없이 그냥 재밌으면 장땡?

교육 집단에서 이런 변화들을 캐치하지 않고 오래된 작법서의 내용을 반복한다?

현장에서 이런 얘기가 어린 말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전두광이라는 인물의 가치에 가까울 것이다. 


<서울의 봄>에서 주인공은 이태신보다는 전두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폭이 미비하지만 이태신 보다는 전두광이 변화의 폭이 크고,

부여된 그림자와 입체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이태신은 그런 전두광을 막으려는 적대자, 장애물이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의 대사와,

해결 부분에서 홀로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마치 오줌을 누듯 웃을 수 있는 세팅이

그의 주인공성을 강화하는 디테일들이다. 

이태신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간이길 포기한 전두광의 영혼은 죽어서도 어디선가 울고 있을 것이다.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에서 예를 찾아보면,

<1987>은 각 씬, 시퀀스를 이끄는 각기 다른 인물들이 갈등 상황으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데,

그것이 여러 인물로 이어져 결국 엔딩 장면에서 모인 대중들에게까지 정서가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1987>의 주인공을 극중 인물이 아닌 관객으로 보는 의견들도 있다. 


<남한산성>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남한산성>은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뜨겁기보단 차갑고 이성적인 영화다.

그럼에도 <서울의 봄>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굴욕스러운 역사적 아픔을 마주할 때,

우리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자리 잡는다. 

<남한산성>에서도 주요 인물은 각자의 가치로 대립하는 최명길과 김상헌으로 볼 수 있다. 

둘의 가치는 옳고 그름을 떠나 둘 다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결국 최명길의 뜻이 이루어지고 김상헌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여기서 상대적으로 주인공성이 강한 인물은 김상헌이었다고 생각한다.

돌보던 어린아이로 하여금 입체성이 부여되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해 

죽음이라는 선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영화는 총체적인 경험의 공유다.  

주요 인물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주인공성을 갖춘 인물들이 있으면 충분하다. 


2-2.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트렌드를 반영하기 까다로운 매체다. 

현대의 트렌드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너무나 빨리 변화하고,

연관성을 예측할 수 없게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영화라는 작품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 역시 그러하다. 

무언가에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미 그 트렌드는 바뀌었을 확률이 크다.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우주의 별빛을 지구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이미 과거의 별빛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 누가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


<서울의 봄>의 절정은 뜨겁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 나라의 아픈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써 목격하고, 

그 뜨거움을 극장에서, SNS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결말이 암시되어 있음에도 천만이 넘는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이유다.

이런 연쇄작용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차가운 겨울을 지나고 있던 극장에 봄을 선사했다.

물론 연말이라는 날짜와, 실제 인물의 죽음 이후 등이라는 기획적인 지점들이 있지만

<서울의 봄>은 트렌디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지만 묵혀온 감정을 트렌드로 꺼낸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트렌들를 반영하려는 노력이 의미 없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관객들을 공감시키기 위한 노력들이니까. 

물론 역사의 가장 큰 의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에 있다. 


2-3. 

과연 누가 <서울의 봄> 같은 작품이 천만영화에 등극할 거라고 예상했을까.


소위 이 분야에 ‘수직계열화’와 ‘기획’이란 단어가 자리 잡으면서, 

창작의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현재에 닿아있다.

관람객과 개봉 편수는 늘었다고 하지만 이야기의 다양성이 죽어가는 것이다.

위대한 스토리가 가진 이야기의 공통적인 원형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고유하며, 만약 성공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의 요소들은 그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서로 융화된 것이라 생각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관객에게 외면받은 작품을 두고 관객의 수준을 운운하는 의사결정자들이 있고,

제작사를 차려놓고 OTT나 채널에 작품과 회사를 팔아 한몫 챙기는 게 성공의 길로 여겨지는 요즘이니.


돌고 도는 트렌드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인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인간의 욕망은 어떠한 범위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기술과 환경이 변화면서 생활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변화를 부추기고 또 그것에 감동받게 만들며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것들도 있다.


바로 ‘이야기’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잠을 자면서도, 출근하면서도,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야기가 재미를 넘어 우리 인간의 삶의 어떠한 가치들을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가의 주제가 아닐까.

재미는 공감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결과로만 여겨져선 안 된다.


그런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변화하는 인간에 대한 열망이다.

인간이 변화해 더 좋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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