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녕 Mar 21. 2023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

세나경

때는 3월,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있던 고딩은 원하는 시간에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 듣고 점심도 원하는 시간에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 대딩이 되었다.

이십여 년간 누군가의 보호를 빙자한 통제 속에 살다 경험하는 그런 소소한 자유는 짜릿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모두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

하지만 방대한 선택지 속에서 무엇을 걸러야 할지 배우지 못한 채 사회에 방생된 햇병아리전벨트를 매지 않고 달리는 스포츠카와 같다는 것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학생 영어공부에 관심 없어요?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가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를 불러 세웠다기보단 무작위로 던지는 영업멘트에 내가 멈춰 섰을 것이다.

영어공부 했어야 했는데 그걸 어찌 아시고, 찰나의 멈칫함을 귀신 같이 잡아낸 영업사원은  나를 교문 앞에 세워둔 봉고차 안으로 유인했다.


"요즘은 영어가 필수예요, 저기 종로 쪽 영어학원들은 비싸기만 하지 생각보다 별로거든요. 그런데 이거 보세요 우리 강의는 진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요 그걸 녹음한 건데 일단 사기만 하면 이 강의는 평생 내 거라니까. 이 가격에 평생 수강이면 거저지."

옥장판, 정수기를 파는 것처럼 영어 강의 테이프를 펼쳐놓으며 이것만 구매하면 영어공부는 끝난 것처럼 얘기했다.


어차피 하는 영어공부 매달 돈 내는 것보다 한 번에 평생이용권을 결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슬슬 감겨들었다.

10개월 할부로 하면 한 달 4만 원 정도, 평생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으면서 그 정도 내는 것쯤은 별거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덜컥 40만 원짜리 토플강의 테이프와 문제집을 겁도 없이 할부로 구매했다.

최저 시급 2,275원이던 때 그 돈을 벌려면 몇 달 치 월급 모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 할부금을 갚기 버거워지면서부터였다.

활용이라도 잘했으면 위안이 됬겠지만 이것만 있으면 된다

했던 강의들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구석에서 먼지만 쌓다.

거기에 차비와 식비 교재비등으로 한 달에 4만 원을 모으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연체로 인한 독촉이 오기 시작했다. 간쓸개도 빼놓을 듯이 살갑게 굴던 곳에서 압류, 고소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들어간 고지서가 날아왔다.

앞뒤생각 없는 한심했던 선택에 대한 혹독한 대가였다.

네 압니다 알아요. 처음부터 사짜 냄새가 풀풀 풍는데 저걸  믿었냐 하는 거

하지만 사람이 홀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집문서도 넘기고 땅문서도 넘기고 그러는 법이고 했다.


윤선생 학습지로 위 내용과 관련 없음

그렇게 사십만 원으로 산 경험은 일단 무엇이든 의심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세상에는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인류애가 사라진 슬픈 교훈이지만 그 덕분에 사기를 당할 기회가 없었는지 아님 피해 갔는지, 직까지 리는 경험은 없었다.




유난히 퇴사율이 높았던 회사에 취직을 한 적이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일명 '경단녀'되었기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있다면 무조건 최선을 다하겠다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물불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부하는 곳은  다 이유가 있는 법.

일분도 쉴 틈 없이 바쁜 것은 둘째치고 사람을 마치 기계 부속품같이 대했다.

하루종일 짜증을 내고 탓하는 책임자의 눈치를 보느라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다.

매일 나를 갉아먹으며 꾸역꾸역 1년을 버틴 건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때문이었다.

지나고 나서는 미련 맞게 참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견디면서 일할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참았을까 결론은 또다시 자기 비하였다.


그런데

"선생님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너무 바빠서 정신없었는데 적절하게 잘 도와주시더라고"

전 직장에서 당연했던 일을 한 것인데 칭찬을 받았다. 1년 동안 견디며 일했던 경험은 나에게 웬만한 일은 무덤덤하게 견딜 수 있는 신경줄을 얻게 해 주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눈치 보고 욕먹으며 일했던 경험도 험이라고 다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삶을 살면서 수 없이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 중 괜찮았던 것도 있겠지만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경험이 생겼을 때는 바보같이 생각이 없었구나 하고 나를 탓하기보다는 이 또한 다 쓸데가 있다고 넘기면 편하지 않을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던 경험은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다 생각하고 날짜를 헷갈려 못 간 여행이 있다면 나중에 더 큰 실수를 만회할 신중함을 얻었다고 여긴다면 그것 또한 소중해질 것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경험.....

















작가의 이전글 맞벌이의 저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