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 길 오랜만에 비가 오고 있었다. 지난 수요일 새벽, 정말 몇 개월만에 몸에 추위가 느껴져 잠을 깬 나는 밤새 틀어 놨던 선풍기도 끄고 작은 여름 담요도 찾아 배를 덮고 다시 잠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달 가까이 옆에 항상 놓아두었던 분신 같은 작은 선풍기를 멀찍히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고 있다. 정말 더운 날씨였다. 아무리 더운 7월, 8월 일지라도 매년 광복절과 처서가 지나고 나면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8월 15일 기다렸지만 광복절이 지나고도 보름이나 더위는 길어졌다. 하지만 자연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기에 9월의 시작과 함께 아침, 저녁의 공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주변에서는 "이제 좀 살만 해졌다!" 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가을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을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참 좋은 계절이다. 더위에 지쳐 있는 심신을 정화 시켜주는 미온수 같은 바람, 끝 없는 파란 하늘,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빨갛고 노란 단풍들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감수성을 200%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난 가을에 글을 열정적으로 쓴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년 내내 글을 쓰다가 그 열정이 식어서 였는지, 갑작스럽게 회사 업무가 많아져서 였는지, 그냥 게을러져서 였는지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올해는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글을 써 보겠다는 마음에 펜을 들어 보았지만 이전이랑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엇을 써야 할지 영 갈필이 잡히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가을을 막 느끼려 하는데 글에 대한 내 감성과 감정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가을은 자연의 입장에서는 추운 겨울이 다가 오기전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최대한 보여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시기 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존재는 봄에 가지고 있던 싱그러운 파스텔 톤의 색을 뽐내기도 하고 어떤 존재는 더 빨갛고 더 노랗게 여름에 가지고 있던 원색을 뽐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색들이 어느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 하늘과 땅, 들과 산, 눈에 보이는 모든 자연에 뿌려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기가 바로 가을인 것 같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가을이 계절 중에 가장 다채로운 색으로 온 세상이 물드려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런 가을에 비해서 나의 감정? 생각? 이런 것들은 참 애매한 시기이다. 1년을 정리하고 돌아보기에는 아직 3~4개월의 시간이 남았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나에게 펼쳐질지, 어떤 행운과 불운이 나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은 빠른 감이 있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에도 앞으로 남은 한해가 조금은 부족한 시기이기도 하다. 정말 "짧지만 긴 시간이 남았다." 라는 문장이 딱 어울리는 시기가 바로 지금 가을인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미 지나온 1년의 3/4 시간 동안 내가 이룬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과 남은 1/4 시간은 내가 뭔가 이루어 보람 있었던 1년이라는 만족감을 가지며 한 해를 마무리 하기에는 조금은 힘들 것 같다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하고 허탈하게 하는 시기가 이 가을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그 허탈감과 함께 짧지만 긴 시간이 남아 있는 가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남은 한 해를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할 지 알지 못해 허둥거리는 사이에 이 낭만이 있고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글 한번 써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 나는 가을에 쓰는 나의 글 속에 허탈감에 빠져 허둥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매년 가을을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회피하며 모른 척 하며 보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40의 고개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을을 그렇게 회피하고 모른척 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세삼 느껴진다. 가을을 준비한다는 것, 가을을 보낸다는 것은 1년 중 내가 한해를 어떻게 마무리 하고 앞으로 다가올 1년을 어떻게 맞이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데 있어 올 한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