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웹툰 기반의 연상호 감독의 '지옥'이 넷플릭스를 통해 선을 보였고 글로벌 인기 차트 상위권에 올라가는 등 그 관심과 주제에 대한 이야깃거리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3년이 다되어간 시점 지옥 2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개인적으로 지옥 1이 볼거리와 액션 거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면, 지옥 2는 그 플로우 구조를 기반으로 [ 묵직한 메시지 ]를 던지는 웰메이드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방대한 서사를 길게 끌지 않고 핵심적인 사건과 인물에 초점 하여 극의 전개를 빠르게 이끌어가며, 시청자들이 그토록 궁금하였던 [ 지옥 ]의 본질적 존재와 그 지옥으로 안내하는 [ 괴생명체들 ]까지 말이다.
지옥 2의 한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가 있다.
" 아, 이제야 신의 뜻을 알겠다.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서로 싸우거 헐뜯게 되며, 그런 곳을 바로 '지옥'이라고 한다. 신은 지금 지옥을 인간 세상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옥 2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대사를 세상 밖에 내던져 놓은 배우는 광기 어린 얼굴을 하며 극 중에 칼을 맞고 쓰러진다.
그렇다, 의미 없는 것에 우리는 [ 의미 ]를 붙이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 '우리가 시련과 고통이 있는 이유', '나에게 불행이 오는 이유', '내가 그 사람을 선택한 이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해야 하는 이유' 등...
어쩌면, 이것은 본질적으로 [ 존재 ] 그 자체의 물음이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시작점에서 파생되는 두려움과 공포의 행태라고 본다.
나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하는 행동 그리고 선택에 [ 의미 ]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있어야 나의 행동과 사고 그리고 나아감에 불안함이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는 사건과 상황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제시한 것일 뿐 늘 [ 특별한 이벤트 ]를 설계하거나 특별히 인간에게만 전달되는 구조로 설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이념이나 교리를 넘어 지구 그리고 이 우주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 영원한 숙제 ]라고 본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지옥을 만들어내고 어떤 형태의 지옥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지옥은 유효한가? 끝이 보이는가? 아님 다시 또 시작되려고 하는가?
지옥 1과 지옥 2를 보게 되면 마치 미쉐린 타이어처럼 생기기도 하였고 대걸래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는 [ 괴생명체 ]가 어느 날 지옥 선고를 받은 인간을 죽이는?! 또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의식을 진행하는 장면들을 이 시리즈를 본 시청자라면 종종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이들의 탄생과 출신 그리고 서사를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인간의 죄악을 판단하고 형을 집행하는지도 나와있지 않는다. 다만, 그런 반복적인 행위와 행태들에서 인간들이 교집합과 행동의 공통분모를 찾아 지독히도 인간적인 관점으로 [ 의미 ]를 부여할 뿐이다.
어쩌면, 앞선 메인 메시지와 같은 결일 수 있다. 이들의 행위와 행동의 패턴에는 아무런 [ 의미 ]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그들의 메커니즘에 맞게 우리가 밥을 먹듯이 하는 행동일 수도 있으며 잠을 자기 위한 습관적 행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의 특성으로 [ 존재의 의미 ]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자연재해가 될 수도 있고 우주의 생명체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인간이 집단적으로 만들어 낸 환각적 증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행동하고 존재한다는 사실만 존재할 뿐 사유의 깊이와 철학적 이유가 존재하는 [ 의미 ]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옥 2의 마지막 부분에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던 정진수 의장은 결국 그토록 자신이 무서워하던 극의 괴생명체로 몸이 변화하며 그들이 존재하는 차원으로 달려가며 사라지는 장면이 있다.
다양한 유튜버 크리에이터분들이 이 장면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이것을 결국 [ 잠식 ]이라고 본다. 단지 그것이 정진수 의장이 피하고 싶었던 죽음이라는 존재이자 그러한 형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지옥이 있다고 작품에서는 말한다. 그 지옥에서 누군가는 살인자가 되기도 하며 또는 정진수 의장과 같이 알 수 없는 괴생명체가 되기도 한다. 또는 내가 정말로 싫어하던 누군가의 모습의 연속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결국, 내가 이유 없는 지옥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결국 내가 두려워했던 그 모든 것이 안에서부터 빠르게 [ 잠식 ] 하게 되어버리고 결국은 존재의 [ 의미 ]를 고찰하는 인간에서 [ 본능 ] 형태로 살아가는 그저 그런 생명체나 유기체가 되어간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형벌이 존재하는 '지옥'이 있다면 가길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락과 편안함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천국'이라는 존재의 형태로 남아 있기를 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위해 선행과 사랑을 나누지만 사실은 깊은 곳에는 [ 오로지 나를 위한 선행, 나를 위한 사랑 ]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고 우린 그것을 '위선'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종종하곤 한다.
지옥행 고지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결국에는 [ 위선자 ] 임을 캐릭터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진실로 누군가를 위하고 애쓰는 마음을 전달한 민혜진 변호사와 지옥에서 돌아온 박정자만이 지옥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행동 관념을 연상호 감독( 개신교 신자)은 민혜진과 박정자라는 캐릭터를 통해 틈틈히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거짓 사랑과 거짓 위선은 걸러지고 [ 진실되고 행하는 사랑 ]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열린 결말은 극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아도 많을 것을 정확히 잘 모르는 존재라고 본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어떻게 정확히 생겨 났으며, 우주의 시작은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는 죽어서 정확히 어디로가서 어디로 소멸되는지 등등
그래서 불완전하고 연약하며 [ 의미 ]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다.
'신'이라고 칭해지는 존재의 무질서와 무의미 앞에 우리가 고수하고 지켜왔던 [ 유의미 ] 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의 또다른 지옥은 시작된다고 본다.
상황적 연속성에 끊임없는 의미의 명분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전체적 삶 자체가 지옥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