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WAVE의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 뉴클래식 프로젝트 ]이다.
2000년대 우리들의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러 명작들을 현재의 화질 기술과 콘텐츠 기술로 재구현하여 다시금 OTT서비스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KBS에서 방영하였던 최고의 명작으로 기억하고 있는 2004년 작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뉴클래식 프로젝트 일환으로 다시금 시청자들에게 찾아왔고 더현대에서는 팝업의 형태로도 그때 그 순간의 경험을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프로젝트에 다시금 관심을 가지고 열광 아닌 열광을 하고 있을까?
소지섭 X임수정 '미안하다 사랑한다 2024', 오늘(22일) 팝업 오픈
대표적으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가지고 솔직 담백한 나의 인사이트를 전달해보려고 한다.
( 물론, 이번 글은 어디까지나 내가 수집하고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인사이트글임을 다시금 전달드리는 바이다 )
돌이켜보면,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방연 한 시점은 2004년쯤이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 및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는 IMF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을 맛보았으며, 위먼브라더스의 경제 대공황이 오기 전의 상황이었다.
경제의 성장률은 극적이지는 않지만 내수경제와 외부 수출에 있어서도 저성장을 하는 시기는 아니었다.
또한, IT서비스의 급성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통신'과 '정보'에 기대와 희망을 가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1990년 대 이후로 무너져 사라진 '중산층'에 대한 회귀 포인트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 작게나마 남아있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2000년대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같은 작품에서도 그 시대의 상황과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 ]을 장면 장면 볼 수 있다. 최근의 드라마에는 살인, 복수, 치정, 불륜, 범죄가 당연한 미장센으로 배치되어 있고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고전 작품을 본다면, 지금의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게 [ 사랑 ] 그 자체를 많이 이야기하고 다양한 기법과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고 있다.
오직 물질적으로 비교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현재와는 다르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라는 사람이 정말 소중해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그 보이지 않은 '희망'과 '사랑'을 함께 나눠보며 작품을 통해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다소 '낭만적'인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당시,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많은 사람들 속에 명대사와 명연기를 남기면서도 사랑받을 수 있었던 많은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 있을 법한 판타지'였다.
현재의 다양한 드라마 콘텐츠는 너무 리얼리즘과 극사실에 초점을 맞춰 때로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울감과 자괴감 그리고 쓸쓸함을 전달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당시 2000년 대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작품만 하여도 사실과 현실에 있을 법한 판타지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부담감 없이 드라마 스토리를 전달하였다.
주인공 차무혁이 '머리에 총을 맞았음에도 시한부 인생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요소'와 더불어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무수히 많은 이별의 기회와 어긋남의 기회가 있음에도 말도 안 되는 우연들의 연속으로 다시 만나는 과정까지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곳에 기대하였듯 기대하지 않았듯 살짝 달콤한 '판타지'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며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극사실적인 부분을 다루는 작품들도 있지만 어쩌면 조금 더 세분화하면 우린 그것을 [ 리얼 다큐 ]라고 부르지 않는가?
2000년대 드라마를 최근 정주행하면 공통적인 것이 [ 아름다운 판타지의 미장센과 배치가 극의 후반부에 두드러진다 ]는 것이다. 결국 그 최종 지향점은 [ 사랑 ]이다. 때론, 진부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럼에도 사랑이 담긴 작품을 원하고 찾는 것은 결국 우리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괴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조차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술과 통신의 발전이 많이 이뤄진 2024년의 작품에 판타지에는 사랑적 요소가 많이 사라지거나 배제되었다.
오직 [ 증오, 분노, 복수 ]만이 뫼비우스 띠처럼 전달되고 이제는 점점 시청자들도 지쳐가는 것이다.
2000년 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는 TV 앞에 모여 시청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밥을 먹기도 하였고 때로는 과일을 먹으면서 캐릭터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24년 다시금 이 작품을 만나는 우리는 태블릿으로 볼 것이며 노트북으로 다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혼자 남은 자취방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그저 멋져 보였던 인물들의 나이대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보았을 때의 해석은 정말 다를 것이다.
나만하더라도 이미 남자주인공의 나이 대에 접어들었는데 그때는 30대라는 나이가 정말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높은 산처럼 보였지만, 현실의 나는 멋진 차무혁은커녕 내일을 살아가기도 버거운 사회인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같은 작품 서로 다른 시간대의 [ 동경과 공감 ]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때론 자발적으로 느끼기 위해 [ 작품 ]을 다시 꺼내서 보기도 한다고 본다.
작품의 시간은 그때 그 시절에 박제되어 있지만 나의 시간과 서사는 계속해서 변화하니깐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채널들로 통해 작품도 각색되고 전달되며 우리 삶도 변해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날이든 현재이든 그 작품이 전달했던 강렬한 스토리와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우리는 지나가거나 놓친 감정을 갈구한다....
( 그 오묘함... 어쩌면 클래식 작품을 다시 꺼내보지 않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차무혁처럼
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낭만의 시대가 아닌 오히려 정말 미안해야 하고 사랑한다는 그 앞에 많은 전제 조건과 수식어가 있어야 하는 우리의 퍽퍽한 삶에 진정으로 조건 없는 이야기와 사랑을 하고 싶은 우리들의 진심을 다시금 2004년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기록된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까? 싶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리고 또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