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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호 Dec 15. 2020

강아지가 날 부끄럽게 할 때

얼마 전에 사정이 생겨서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했다. 백설 공주처럼 털이 하얗고 눈이 큼지막한 강아지들을 둘러보던 나와 릴리는 한쪽 구석에서 날 좀 보라며 깡충깡충 뛰어오르던 까만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인형처럼 예쁘지만 어딘가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다른 아이들에 비해 검정콩처럼 까만 그 아이는 우리를 보며  '나를 봐줘, 나를 봐줘!'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어린 반달곰처럼 까만 털, 까만 눈, 까만 몸집에 갈색 털이 군데군데 난 그 강아지는 시바견이었다. 우리는 한눈에 반해버린 그 아이를 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해피”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행복하게 잘 자라고, 우리와 행복하게 살자고. 


해피를 집에 데려오자마자 배변 패드를 깔아주고, 원래 있던 작은 고양이 집을 해피에게 내주고, 울타리를 넓게 쳐줬다. 그리고 곧바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강아지 양육법에 대한 책들을 훑어보다가 강형욱의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라는 책을 주문했다. 그동안 개는 여러 마리 키워봤지만 언제나 가슴 아프게 이별했는데 이번만큼은 제대로 키워보고 싶어서였다. 

우리집 막내, 해피

책에서 내가 알고 싶은 정보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먼저 집안 아무 데나 배변 실수를 해서 내 일이 몇 배로 늘어나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법, 사람을 물지 않게 하는 법, 시끄럽게 짖어서 이웃에 민폐가 되지 않는 법, 산책을 잘 시키는 법 등등.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법을 익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내 짧은 생각은 책을 읽으며 박살났다. 작가는 이미 제목에서 예고했듯 개를 키워선 안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강아지를 무턱대고 훈련하려 들지 말고 먼저 강아지의 생리와 습성부터 배우고, 무엇보다 강아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힘주어 들려줬다. 그렇게 애정과 관심을 주면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편의에 맞춰 훈련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책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랬다.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꼬물거리는 작은 강아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릴리를 키웠을 때가 떠올랐다. 


너무 어려서 괄약근을 조절하지 못해 아무 데나 실수를 하고, 같이 놀아주지 않고 관심을 주지 않으면 이상행동을 하며 아픈 마음을 표현하는 강아지처럼 아이도 놀아주고 관심을 가져야 할 꼬꼬마 때 일하느라 바빠서 좀처럼 놀아주지 않는 내 노트북 마우스를 가위로 자르며 침묵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가위로 한창 작업 중인 내 마우스를 자르고, 놀아주지 않는 엄마를 포기하고 아장아장 혼자 놀이터에 가서 모래 장난을 하던 아이. 아이와 나는 그때 이미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우리가 정말로 소통을 하고 있었을까, 마음과 마음을 정말 나누고 있었을까, 사뭇 자신 없어 진다. 


사이토 하루미치가 쓴 <서로 다른 기념일>이란 책이 있다. 심각한 난청인 마나미란 사람과 그보다 정도는 심하지만 역시 수어가 편한 난청인 사이토라는 사람이 만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인 아이 이쓰카를 낳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 책이다. 사이토는 딸인 이쓰카가 태어난 지 석 달이 됐을 때 청력검사를 받는다. 그 검사를 최대한 빨리 받은 이유를 읽으며 생각이 짧았던 나는 또 다시 부끄러워졌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듣는 게 좋다, 혹은 듣지 못하는 게 낫다와 같은 바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곁으로 찾아온 생명에게 적절한 소리를, 아이에게 어울리는 소리를 빨리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고 했다. 즉, 아이와 소통하려고,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단을 알기 위해 검사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아이와 소통하려고 절실하게 노력한 적이 있나, 반성했다. 


말 못하는 강아지와의 소통, 말 못하는 갓난아기와의 소통, 말문은 트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과의 소통, 말은 멀쩡하게 잘 하지만 좀처럼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어른들과의 소통을 다시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언어만이 소통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실 문제는 언어가 아니었다. 


상대가 강아지건, 아이건, 어른이건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의지와 관심, 상대의 마음에 가닿으려고 하는 정성, 상대의 이해 속도에 맞춰 소통할 수 있는 배려가 중요한 것이었다. 강형욱의 그 책을 읽은 후로 나는 강아지를 훈련하려 했던 마음을 다 접고 강아지의 표정을, 몸짓을, 소리를 듣는데 더 집중하게 됐다. 그러면서 딸아이와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 오래전 내가 놓쳤던 아이의 작은 마음을 이제라도 조금씩 다시 잡아보고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보다 잘 살고 있어: 이 시대 2인 가족의 명랑한 풍속화

박산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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