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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여자들 Dec 24. 2020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글쓰는여자_푸른산

오늘은 그래도 참을 만한 더위였다. 

광기 어린 태양도 자취를 감추었고, 간간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병원에 다녀와서, 엄마의 체위를 변경하고, 석션 기계를 이용해 가래를 제거한 후, 기저귀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의 허기진 배를 냉장고에 있는 불어 터진 죽으로 달랬다. 

그리고 담당과장과의 면담 결과를 정리해서 가족 밴드에 막 올리려던 참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는데 큰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 창의 완료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어떻게 뭐래?’


간결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인 말투! 채근하는 오빠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아닌 타인이 결정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지지하거나, 결정을 대신해준다면 더더욱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일이 있다. 이번 경우가 그러했다. 엄마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지금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뇌출혈 이후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엄마에게 계속 산소공급을 할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섣부른 우리들의 생각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담당과장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산소공급을 하고 안 하고는 가족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산소발생기 제거 이후 건조해지지 않게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퇴원 당시 폐렴 증상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20여 분 남짓한 상담내용을 ‘어떻게 뭐래?’라고 다그치듯 묻는 오빠에게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에 친절한 설명은 오빠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별반 달라지지 않을 상황과 의식도 돌아오지 않으면서, 모두가 고통받는 시간만 자꾸 길어진다고 생각되었는지, 답답해하며 나에게 다른 해결책을 다그치듯 묻고 있었다. 차근차근 설명하던 나의 목소리가 순간 평정심을 잃고 격양되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니 네가 힘드니까? 그러지!’


오빠의 말끝이 흐려졌다.

전화를 끊고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가슴 저 깊숙이 꾹! 꾹! 눌러 놓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깊은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2020년 7월 24일 0시 15분 

다급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119를 불렀다.

0시 45분 응급실에 도착하고, CT 결과가 나오고 병원에서는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수술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를 중환자실로 옮기고 첫 번째 호흡곤란이 왔을 때, 담당의사는 연명치료에 대한 가족의 동의를 구했다. 일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이 동요되는 듯 술렁거렸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더 이상의 연명치료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엄마는 너무 오랫동안 아팠고, 6년 전 치매가 오고, 3년 전 고관절 골절 이후부터는 누워서만 생활을 했다. 엄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지난 6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죽음의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그래서 수술이나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가 호흡으로 가능한 삶, 그게 엄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 후 우리는 엄마를 집으로 퇴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형제들이 상상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3주가 지났지만, 엄마의 상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처럼 눈도 뜨지 않고 몸을 축 늘어트린 채,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잠을 자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있었다. 24시간 전문 의료진도, 고가의 의료기계도, 응급조치도 불가능한 상황이라서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 같았지만, 엄마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일상은 씨실과 날실처럼 긴장과 불안으로 짜였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독박 돌봄과 간병이 중첩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밤에도 계속되는 간병으로 나는 수면부족과 만성적인 피로감에 시달렸다. 매일같이 그들의 전화를 받았고, 그들도 주말마다 번갈아 가며 내려와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들의 삼시 세 끼와 잠자리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엄마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이 상황을 형제 중 막내인 내게 맡겨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서로의 의견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누구는 당장이라도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병원비를 걱정했다. 또 누구는 엄마의 뜻대로 임종을 집에서 지켜보자고 했고, 누구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집에서 돌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이제까지 엄마 돌보았던 나에게 다시 임종과정을 지켜보게 하는 것도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지금까지 엄마를 돌보며 함께 사는 내게 그들은 늘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은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미안하다'는 그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나는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그들에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병원 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퇴원할 것인지?, 요양병원으로 모실 것인지?, 집에서 임종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를 두고 그들이 고민하고 선택한 결정을 나는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었다. 혹여라도 엄마가 돌아가시더라도 그들이 더 이상 내게 미안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들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퇴원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된 피로감 때문인지, 나는 무척 예민해졌고 말 수도 적어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미안해하는 그들의 마음까지 챙기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엄마를 돌보고, 간호를 하며 나는 엄마의 침대 아래에서 쪽잠을 잤다. 하루도 빠짐없이 2-3시간 간격으로 석션을 했고, 하루 3번 꼬박꼬박 설사를 하는 엄마의 아랫도리를 닦아주고, 물로 씻어주어야 했다. 기관 삽입한 목의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거즈를 교체하고, 오염된 침대 시트와 엄마의 옷도 세탁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욕창 예방을 위해 체위도 변경해야 했고, 기저귀도 갈아야 했다. 축 늘어지고 열이 나는 엄마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고, 옷을 벗기고, 다시 입히고, 수건으로 닦고, 살피다 보면 나는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퇴원 후 세 달이 지났다. 막막했던 추석명절도, 아빠 제사도 지나갔다. 

나의 일상은 돌봄과 간병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엄마를 돌보기 위한 살림살이도 늘었다. 산소발생기, 석션기, 산소포화도 측청기, 체온계, 피딩백 그리고 날마다 수시로 사용하는 각종 일회용품과 멸균 생리식염수, 소독약, 거즈, 하루 세 번 먹이는 경관 영양식 등등. 

일주일이면 간호사가 집으로 두 번 온다. 엄마는 가끔 눈을 떠서 이제는 나와 눈을 마주친다. 말도 할 수 없고, 그 눈빛이 한없이 서글프게 느껴지지만, 엄마와 나는 다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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